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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헌신자 ‘아버지’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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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헌신자 ‘아버지’에 대한 기억

안무가 최은지의 데뷔작 『빈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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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지안무의'빈잔'
[글로벌이코노믹=장석용 객원기자] 『빈 잔』으로 신진 안무가에 등재된 최은지는 ‘인연’에 엮여 자신을 희생하는 대부분의 아버지(김준영)에 대한 아픔을 강열하게 표현한다. 결혼, 등록금, 용돈에 얽혀있는 세 딸의 요구에서 자유롭지 못한 아버지는 매일 ‘딸들의 무시’를 감내하며 소주 몇 잔으로 버틴다. 서로에게 각질처럼 붙어있는 앙금을 털어내는 과정은 섬뜩할 정도로 무섭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세 딸(최은지, 이다애, 박다혜)은 앙칼지게 조직적으로 아빠를 괴롭힌다. 스토리가 있는 춤극 빈 잔은 공감을 이루는 소재, 주제에 밀착된 연기로 진정성을 확보한다. ‘외로이 식탁에 앉아/소주잔을 채운다/찰랑거리는 술잔/허나 채워지지 않는다/여전히 빈 소주잔’, ‘빈 잔의 이미지이다.
아버지와 세 딸의 공간은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파열음이 실탄의 파편처럼 떨어지고, 개화되거나 부화될 것 같지 않은 가족은 판타지라는 단어조차 꿈꾸지 못한다. 현대무용의 일면, 그 잔혹성은 견고한 기교와 심리묘사로써 피할 수 없는 소극장 공간에서 나약한 아버지를 향한 적개심과 앙칼짐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버지는 기꺼이 화장(話葬)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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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지안무의'빈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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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지안무의'빈잔'
일상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의 존재는 쉽게 잊혀지는 편이다. 바쁜 현실 속에서 소중한 사람에 대해 잊고 살아가는 이야기는 슬픈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단절된 대화 속, 아버지의 삶 자체는 사실감 있게 묘사된다. PADAF 공연의 취지에 맞는 무용과 연극의 크로스오버는 현대무용에 연극적 요소를 적절히 가미, 감정 표현을 극대화 시킨다.
최은지 안무의 구상선은 과유불급을 선택한다. 보다 너른 세상을 위해 자신의 현재를 인지하고, 핵심적 춤 요소들과 연극적 동작 사항들을 디테일하게 포진시킨다.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아버지를 희생시키는 행위는 공포를 넘어 테러에 가깝다. 최소한 지켜야 할 장벽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아버지라는 뿌리는 뽑히고, 침탈에 속수무책인 민중들의 삶에 귀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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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지안무의'빈잔'
아버지는 늘 그 곳에 존재한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라도, 벼랑 끝에 내몰려도 그는 그 곳에 서있다. 아무도 몰라줘도 개의치 않는다. 스스로 비정한 세상의 이치라고 정의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희생과 헌신으로 고독과 외로움을 덮어버린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그 곳에 서있다.’ 아버지가 존재감을 상실해가며 허술하게 보일수록 춤 연기는 빛난다.

세 딸의 일상적 능멸에 잠식당한 아버지라는 그림자의 무게는 우울한 현대의 풍향계를 곁에 두고 침묵의 제()’를 올리는 것처럼 무겁다. 안무가 최은지는 짧은 시간 내에 화두 빈 잔에 대한 쾌답(決答)을 무난하게 적어낸다. 그녀는 탐미와 성숙으로 가는 길목에서 무용과 연극적 상상력을 자신의 춤 생태학으로 만들어가는 바람직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가족의 일상적인 모습 안에 아버지의 소외감을 나타내는 강허달림의 꼭 안아주세요’, 아버지의 독백, 아버지의 화목한 가정에 대한 회상은 타악기와 추임새’, 아버지의 삶은 애절한 노래로 감정을 이입시킨다. 깨우치지 못한 슬픔, 최은지 안무의 빈 잔은 자신을 참회하며, ‘과격한 율동으로 현대무용의 트인 장점들을 벽돌을 쌓듯 차분히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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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지안무의'빈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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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지안무의'빈잔'
부닥칠 때마다, 튕겨 나오는 아버지와의 불협화음은 안쓰러움으로 출발하여 이윽고 코미디적 틀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피할 수 없는 빈한의 긴 겨울에 대한 직설화법은 감각의 제국에서 탈피하고자하는 대중심리를 최대한 이용한다. 무기력한 아버지가 취할 수 있는 보편적 도구는 술이며, 빈 잔에 투영되어 있는 진한 허무가 마른 눈물로 남아있다.

빈 잔빈 집의 이미지처럼 쓸쓸하고 황량하다. 비우지 못하는 인간들의 속성을 빈 잔에 담아 분절된 가족의 고단하고 허기진 삶을 그린 최은지의 안무작은 작은 울림을 준다. 현대라는 푸줏간에 걸린 서민적 우리들은 미래에 대한 향방의 촉수를 잃어버리고 방황한다. 최은지의 빈 잔은 이 시대의 고통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자 하는 희망의 불씨이다.

/장석용 객원기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