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는 진지함에서 난장을 오가며 섬세하게 연출된 춤으로 구성의 묘를 보이며 타고난 장난끼를 발동한다. 거친 야성의 물줄기를 끌어오고자 했으나, 춤은 예쁜 포장지에 쌓인 미색의 범주를 과감하게 뛰어넘지 못한다. 처절한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춤의 한계이다. 천부적 리듬감으로 춤을 저어 거친 춤의 바다를 항해하는 하안거와 동안거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영혼을 구가하며 울림의 몸짓으로 쓰는 몸 시(詩)는 톡 쏘는 암모니아 냄새와 여름날의 발효과정을 거친 광시(狂詩)가 되어야 한다. 홍희망은 거친 숨결과 땀방울로 빚은 소금으로 남아야 했다. 그녀의 ‘다이어트에 관한 보고서’는 쓴 맛 보다는 단 맛이 더 많이 난다. 이 작품은 풋풋한 ‘처녀들의 수다’이다. 웃자고 만든 작품이었으니까 유쾌하지만 통쾌하지는 못하다.
『행그리』의 문제의식 제기는 훌륭하지만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치들이 촘촘히 들어서지 못했다.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부대낌을 처리하는 방식을 좀 더 고려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희망은 장래의 성장의 면모를 보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정직한 방식보다는 독창적 문제적 작품으로 만드는 용기와 모험이 필요하다.
‘행그리’로 틀어진 몸짓은 연애를 하기 위한 것, 직업을 갖기 위한 것, 타인의 관심을 받기 위한 것 등으로 외적 미모를 가꾸어 가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꼬집는다. 건강한 여인들의 행보를 격려하는 『행그리』는 안무가가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 되어버린 플라스틱 소비자들의 째고, 늘이고, 붙이는 습관성, 모방성 성형천국에 고하는 고발장이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버린 엄연한 현실에서 언제부터인가 다이어트는 ‘꼭, 평생 해야 하는 것’ 으로, ‘살 만 뺏는데 성형수술 한 것 같다’라는 말이 있듯 다이어트의 목적이 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다이어트에 더욱 관심을 갖고, 먹고 싶은 걸 포기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아사시키면서 몸매를 변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날씬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살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면서 좀 더 살을 빼면 아름다워 질 것이라는 욕구에 사로잡힌다. 이런 욕구들은 정상 체중임에도 불구하고 더 날씬해지기 위해, 내 능력의 일부를 높이기 위해, 체중을 과도하게 줄여야겠다는 집착으로 무조건 굶거나 과도한 운동을 하게 된다. 안무가는 이런 과정을 담기위해 춤은 작위적 행위를 불사한다.
홍희망, 춤에 대한 열정으로 가을의 연시처럼 익어갈 안무가이다. 그녀의 『행그리』는 미진함으로 더욱 빛나 보인다. 비움으로 채울 공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플라타너스와 같은 마음으로 너른 그림자를 만들어 낼 춤꾼이다. 상처를 만들어 낸 시대의 중증 외모 콤플렉스를 들추어내며 탐구심을 발휘하고 있다. 꾸준히 노력하면 만춘(晩春)의 화사가 영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