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샤막의 저편 등을 진 춤꾼(장혜주, 양정수의 분신)은 긴 흐름으로 춤의 사연(史緣)을 연기한다. 샤막이 걷히고 혜주를 포함한 남녀 세 커플 패션쇼의 주인공처럼 젊음을 뽐낸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던 열 개의 문을 통해 새로운 세상은 열렸고, 빠른 속도의 음악이 젊은 시절을 반영한다. 다소 느린 피아노, 느긋한 첼로가 있던 시절, 인생은 장밋빛이었다.
현대무용 『어떤 걸음입니까? 비, 걸음, 2014』 는 발레연기가 탄탄한 간판스타 장혜주를 전면에 내세우고, 현대무용과 발레가 같은 뿌리임을 밝힌다. 해독 가능의 춤, 서정의 틀에 얹힌 춤꾼들은 설정된 느릿함으로 느림의 비린내를 풍긴다. 젊음의 춤꾼 혜주는 여왕처럼 받들어지고 백색유희 위로 뿌려지는 다양한 색상의 조명, 흐르는 강물의 깊이로 세월의 흐름을 읽어낸다.
늘 새로움을 주창한 모방기 투성이의 진부함보다 마지막 낭만파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순수지향의 춤꾼임을 밝히는 양정수는 자신의 춤 철학 ‘찬란한 하나되기’를 실천하고 있다. 뜨거운 여름속의 연인들은 추억을 남기고 바람 속으로 흩어지고 작은 걸음위로 가벼운 흔적을 남긴다. 젊은 날의 ‘가벼움’은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변명의 단어다. 깊은 슬픔이다.
가슴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다가오도록 커다란 손수건이 된 『어떤 걸음입니까? 비, 걸음, 2014』 는 낮은 데로 임한 대중친화력을 갖춘 작품이다. ‘그대에게도 스쳐지나갈 비’, ‘걸음의 흔적’에 관한 양정수의 춤 리포트는 춤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문학, 예술, 고향을 한번 쯤 생각해보게 하는 낭만 바이러스를 장착, 의도적 음습을 털고, 유쾌한 상상의 무늬를 남겼다.
밝고, 경쾌한 춤들과 바둑판무늬의 의상들이 조우하면서 희망의 춤들은 새로운 진영을 갖춘다. 비들이 만든 물방울 합창과 진전의 걸음은 삶의 실핏줄이 뛰게 만들었던 근원이었다. 그녀는 어지러울수록 추억 속에 갇혀있는 자신을 끄집어내어 반성의 도구로 삼는다. 추운 겨울, 거친 눈보라에도 서로를 감싸며, 상처를 어루만지며 꿋꿋이 서있는 나무가 되고자 했다.
양정수는 동물원이라는 세상의 옆 미술관 큐레이터 역을 해왔다. 거친 세상의 흐름 속에 춤으로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의 의자들을 생각해 내는 남다른 시선과 ‘이 시대의 낭만주의 춤의 의미’라는 담론을 상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분위기를 느긋하게 즐긴다. 자연과 이성의 아날로지로 판타지를 빚어내는 이 작품은 시적 이미지들로 고도의 진지성을 소지하고 있다.
그그녀의 기억 속엔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풍선에서 부터 겨울 바람개비에 이르는 외관에 대한 이미지 포착, 손과 가슴으로 만지고 느끼는 유년의 유희, 성숙으로 가게끔 한 비와 바람 소리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감에 대한 경외감, 난로위에 얹힌 느린 커피의 잔향(殘香)이 포진해 있다. 바람직한 것은 그녀가 회상의 숲에 너무 오래 갇혀 있지 않는 일이다.
양정수의 『어떤 걸음입니까? 비, 걸음, 2014』는 그녀의 심상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정화(淨化)의 상징인 물로 풀어낸 그녀의 이야기는 비뚤어진 세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반성을 친구로 삼고, 마음 씻음의 앞자리에 설 것을 권한다. 양정수파의 작품이 대중들의 인지도를 확장하고 닫힌 마음을 열게 해주었다. 언제나 그녀의 춤이 맑은 춤으로 남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