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웃음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큰 사람'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성숙은 없어
필자가 알고 지내던 친구 중에 모 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전념으로 연구와 교육을 위해 애쓴 이익섭교수가 있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이교수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유학 시절에 처음 만났는데 이 친구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필자는 심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강의실에서 자주 만나면서 친분을 쌓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시각장애인이 공부할 수 있는 교육시설이 고등학교까지밖에 없어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이 대학 공부하기가 어렵운 형편이다. 이 친구가 교수 생활을 하기 전에 잠깐 장애인 복지에 관련된 기관에서 일을 했는데, 이 점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중 ‘독학사자격증’ 제도가 생기자 이 친구가 시각장애인들에게 학사학위를 딸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고 교육을 시작했다. 유학 시절에 같이 공부했던 친한 교수들에게 독학사 자격증 관련 과목을 하나씩 맡겼기 때문에 필자도 기꺼이 ‘심리학 개론’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학기가 거의 끝나갈 어느 날 이 친구가 저녁을 한 번 사겠다고 해서 함께 음식점에 갔다. 이 친구가 가끔 가는 횟집에서 먹고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던 중 이 친구가 최근에 보건복지부 장관하고 같이 청와대 들어가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눴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장관은 대통령 앞이라 아무 말 못하는데 자기는 할 말 다 하고 왔다고 뿌듯해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가 천연덕스럽게 “내가 눈에 뵈는 게 있냐?” 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자마자 긴장이 탁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음식점이 떠나갈 듯이 웃었다. 이 친구는 진짜 보이는 것이 없지 않은가? “난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 사실 이런 표현은 대개 눈이 보이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우스워져서 크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친구라도 제가 혹시라도 이야기하다 잘못해서 시각장애인인 이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조심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오히려 이 친구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마음이 없어지고 아무 말이나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편하게 웃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접시에 남은 마지막 회 한 점을 이 친구가 집어먹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을 걸 왜 네가 먹냐?” 그랬더니 이 친구가 “내가 눈치가 있냐?” 고 대답을 해서 또다시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했다. “그래, 너 눈치 없어서 좋겠다.” 둘이서 낄낄거리며 한참 웃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이 친구가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웃을 수 있는 소재로 삼기까지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갑자기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12살 때 어느 날 갑자기 망막염을 앓아 시력을 잃어버린 사건을 이 친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디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앞산에 연분홍색 진달래가 활짝 피어있던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모습이라는 그 친구에게 아마도 그 사건은 어린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나고 괴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노력했으면 이 힘든 경험을 이겨내고 자신이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을 웃음의 소재로 삼을 수 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이 친구가 얼마나 ‘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무리 친구지만 존경하게 되었다. 그 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친구를 생각하면 큰 위로와 힘을 얻곤 한다.
이것이 진정한 웃음이고 유머이다. 유머는 단지 재치로 좌중을 웃기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유머는 고통스러운 것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스런 감정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웃음의 소재를 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유머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익살이나 재치에 불과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낄 때 보통 짜증을 내거나 울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감정을 소재로 웃다는 것은, 더욱이 그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괴로움을 웃음의 소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만이 자신의 고통을 소재로 웃을 수 있다.
위 상황을 조금 다르게 각색해보면 유머의 진정한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가장애인 친구와 필자가 저녁식사를 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친구가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을 다했다고 이야기한다. 그 때 필자가 “넌 참 좋겠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아무 앞에서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으니까”라고 농담을 했다. 그리고 또 “넌 눈치가 없어서 좋겠다. 네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어서”라고 말하면서 그 친구랑 같이 웃었다고 자. 이게 과연 성숙한 유머일까??
물론 아니다. 이것은 재치이거나 위장된 공격성일 뿐이다. 같이 웃는다고 다 유머가 아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친구를 따라다니면서 절뚝거리는 흉내를 내면서 재미있게 웃었던 부끄러운 장면이 기억난다. 말을 더듬는 친구를 흉내 내면서 놀리다가 자신도 말을 더듬게 되어 곤욕을 치른 사람도 있다.
보통 사람의 경우, 대개는 자신의 핸디캡이라든가 불리한 점은 방어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지적하거나 웃음거리로 삼으면 불쾌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아마도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족까지 나서서 심하게 방어하고 공격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가지고는 얼마든지 웃을 수 있지만 자신의 고통을 아무 방어 없이 웃음의 소재로 만드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머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고통을 마치 남의 고통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아무리 진한 공감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고통만큼 아프지는 않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자기객관화’라고 부른다. 자신을 객관화시켜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 것 처러 입장이 바뀌게 되니 비교적 쉽게 자신의 고통을 웃음의 소재로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유머를 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 편, 유머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이 이미 고통이 아니어야 한다. 물리적인 아픔이야 계속 남을 수 있지만 고통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주관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제 친구의 예를 다시 들면,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과 그에 따른 불편함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눈이 안 보이는 것 때문에 겪는 심리적 고통은 어떨까? 이미 심리적으로는 물리적인 고통을 극복했을 것이다. 아무리 자기 약점을 이야기하며 상대를 즐겁게 해준다 해도 이야기하는 당사자가 고통스럽다면 상대방이 웃을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고통이라는 것이 수반되지 않은 성숙은 없다.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다. 많은 선남선녀들이 행복한 가정을 꿈꾸고 결혼식을 올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아마도 자신들의 가정만은 지상에서 제일 행복한 가정이 되리라고 꿈꾸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통계에 의하면 이들 중 1/3은 이혼으로 끝난다. 왜 그럴까?
아마도 행복은 고통이라는 자양분을 먹으며 자라는 ‘잔인한 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절로 얻어지는 행복은 없다. 단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물리적 조건에 대해서는 곧 친숙해지고 더 이상 즐거운 자극의 기능을 못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려움이 닥치면 곧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고 대상을 바꾸려고 한다.
진정한 행복은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마음의 힘에서 나온다. 이 힘을 기르기 전에는 또다시 고통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주위에서 “살 재미가 없다”거나 “웃을 꺼리가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그 수많은 동물 중에 웃을 수 있는 동물은 유일하게 사람밖에는 없다. 그만큼 웃음은 가장 인간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행복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