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삶
미워하는 마음 자신에게도 숨기고…
'반동형성'에 의한 극단적인 행동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라는 속담이 있다. 미운 사람에게는 하나도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오히려 고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왜 미운 사람에게 떡을 하나 더 줄까? 이 속담의 본 뜻은 ‘미워하는 사람에게 미워한다는 티를 내면 혹시 뒤에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일부러 후하게 대한다’라는 것이다. 즉 본래의 마음을 감추고 오히려 반대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후환이 없다. 여기에서는 상대를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의식하고 있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반대로 행동해서 상대를 속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로부터의 비난이나 처벌이 두려워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의식의 영역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평소에는 지각하고 있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정신의학자 프로이트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의식하는 부분은 무의식에 비하면 그 양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무의식에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의식의 의식화’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속담이 무의식적으로도 일어날 수 있을까? 즉, 자신이 상대방을 미워하고 있지만,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반대로 더 잘 해주는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정답은 ‘그렇다’이다. 얼마든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과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 차이를 정확히 알아야 ‘무의식의 의식화’가 일어날 수 있다.
먼저, 의식적으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경우에는 행동하는 자신이 상대방을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연히 미운 놈에게는 떡을 하나 더 주기는커녕 매를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들킬 때 따라올 결과가 두려워 오히려 반대로 떡을 하나 더 주어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면 어떨까?
이렇게 자신의 본래의 감정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반동형성’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반대로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떡 하나 더 주는 이유는 상대방이나 주위 사람에게 자신이 미워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이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상대방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서이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소위 ‘양심(良心)’이라고 불리는 ‘내부의 감시자’가 있다. 따라서 양심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감정이 생기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자신을 비난하고 처벌한다. 설사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아 외부의 사람들은 모르는 경우에도 만약 자신이 양심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과일을 따먹은 벌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렇다면 양심의 처벌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그런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고 있으니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다. 반동형성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떡을 하나 더 주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과 반동형성을 사용하여 무의식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속이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정답은 속담에 이미 다 나와 있다. 먼저 반동형성에 의한 행동은 ‘극단적(極端的)’으로 나타난다. ‘다른 놈’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떡을 하나만 주어도 될텐데 ‘미운 놈’에게 유독 두 개를 주게 된다. 물론 상대방을 미워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니 한 개를 더 주는 극단적 행동을 하게 된다.
반동형성에 의한 행동의 또다른 특징은 ‘강박적(强迫的)’이라는 점이다. ‘강박적’이라는 것은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면 가능한 한 빨리 손을 닦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손 씻는 행동을 강박적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를 더 주지 않으면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무리해서라도 떡 두 개를 주어야 마음이 놓인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을 자신이 알까봐 불안해지는 것이다.
한 유명 작가와 부부동반으로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난 후 혼자만 왔길래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이유가 어떻게 보면 약간 의아한 것이었다. 지방에 사시는 부모님이 오랜만에 일주일 정도 머무르실 예정으로 아들집을 방문하셨는데 예정보다 일찍 고향으로 내려가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작가가 생각하기로는 부모님이 일찍 가신 이유가 부인, 즉 며느리가 너무 잘 대접을 한 까닭이라는 것이었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도 있듯이 며느리가 너무 대접을 잘 하니 부모님의 마음이 오히려 불편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싸움을 했단다. 남편에게서 “부모님을 너무 잘 모셔서 불편해서 일찍 내려가셨다”라는 질책을 받은 부인은 기가 막혔겠지만 작가의 섬세한 감성이 부인의 무의식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 작가는 아마도 부인이 ‘반동형성’을 사용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주위에서 보면 감정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별로 반가울 것 같지도 않은 사이인데 오랜만에 만났다고 돌아가신 부모님이라도 뵌 것처럼 반색을 하며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동창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혹시 동창생을 미워하는 자신을 속이기 위해 더 반갑게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서 심심풀이로 적은 금액을 걸고 화투놀이를 할 수도 있는데 “돈내기 화투는 도박”이라고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펄쩍 뛰면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있다. 혹시 이 사람은 사실은 자신도 돈내기 화투를 굉장히 하고 싶은데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해 과잉반응을 하는 것은 아닐까?
반동형성은 여러 행동에서 나타날 수 있다. 마음 속으로는 선생님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지나치게 그 선생님을 미워하고 험담을 할 수 있다. 사실은 겁이 많은 남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폭력배들에게 덤빌 수도 있다. 한 학생을 미워하는 교사는 유독 그 학생에게만 열심히 공부를 가르쳐줄 수 있다.
반동형성을 사용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덕적이라는 인정(認定)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반동형성을 사용하는 대가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해야 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경직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성숙하게 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식적으로 개선하려는 삶이다. 물 흐르듯이 상식적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삶이 성숙한 삶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화내는 삶이 성숙한 삶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부족함과 같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