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기대고 싶은 마음 도전적 새 길 개척 어렵게 해
엄격한 훈련 통해 능력 길러야 어려운 일 극복 가능
2015년 새해가 밝자마자 소위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이 터져 온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지난 5일 미국 뉴욕 출발 대한항공 여객기에서 이륙 전 승무원의 견과류 서비스 방식을 문제 삼아 고성을 지르며 소란을 피우다 결국 항공기를 돌려 승무원들과 기내 안전을 총괄하는 사무장을 내리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조현아 전 부사장은 1시간30분 뒤인 오후 3시 조사를 받기 위해 국토부 김포 사무실에 출석하면서 잠시 낮은 목소리로 취재진을 향해 "죄송하다"며 "사무장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왜 사건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60대 중반의 아버지가 대신 사과를 하는가? 자식이 어린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조 전 부사장은 40세이고, 자신이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이기도 하다.
우선 대한항공의 조양호 회장 자신이 직접 회사를 창업하고 키운 것이 아니라 선대(先代)가 세운 회사를 경영 능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물려받은 것이다. 부모가 세운 가업을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로 물려받았다가 경영에 실패하여 기업 자체가 사라진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실정에서 대한항공을 계속 잘 키웠다는 것은 경영 능력이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후에 결과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고 회사를 물려받은 당시에는 능력이 검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조현아 전 부사장 자신도 40세의 젊은 나이에 부사장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아버지가 경영하는 가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 전 부사장뿐만 아니라 아들과 막내딸 등 조 회장의 자녀 모두가 아버지가 경영하는 다양한 사업체에서 중요한 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단지 대한항공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현재 물밑에서 3대째 세습을 준비하고 있는 삼성그룹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고 현대자동차, LG, SK 등 한국을 대표하는 모든 재벌기업에 다 해당되는 현상이다.
‘부모-자녀 동일체’ 의식에 근거한 세습 현상은 비단 재계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정치계에서도 아버지의 지역구를 그 자녀가 물려받는 경우도 많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큰 자산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교육계에서도 아버지가 세운 학교를 자녀가 물려받는 것은 비일비재하다. 국내의 유명 사립대학교의 상당수는 설립자의 자손이 물려받은 것이다. 오죽하면 북한에서는 국가 권력을 3대째 세습하는 기현상도 “대를 이어 충성한다”는 미명 하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모-자녀 동일체’ 문화에서는 심리적으로 부모와 자녀가 서로 미분화된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된다. 즉, 부모와 자녀가 서로 분리(分離)된 인격체로 독립적인 삶을 영위해가기가 어렵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자녀가 적성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지지해주기보다는 자신이 일군 가업을 물려받기를 원한다. 자녀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어려움과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부모가 이미 키워놓은 결과물에 얹혀 안주하고 싶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부모는 자녀의 행동에 대해 무한 책임을 느낀다. 자녀는 나이에 상관없이 부모의 마음속에는 항상 돌보아주어야만 하는 어린 자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60대 중반의 아버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굴지의 항공사 부사장이며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인 40대 딸을 대신해 "(모든 것은) 저를 나무라 달라. 저의 잘못이다"라며 "제가 교육을 잘못시킨 것 같다. 죄송하다"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딸이 받을 비난을 자신에게 돌리게 하고 딸을 보호해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은 딸의 나이나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이 없다. 물론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딸이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자신의 뒤에는 항상 대신 사과하는 등 궂은 일을 맡아주고 사태를 무마시켜 줄 든든한 바람막이가 있으니까.
“책도 좀 읽고, 자기수양(自己修養)의 기회로 삼도록 해라.”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최근 구치소에 수감 중인 장녀 조현아 전 부사장을 면회했을 때 했다고 전해진 대화 중 일부이다. 언뜻 들으면 물의를 일으킨 딸을 꾸짖는 듯하지만 조 회장은 혼자 있을 때는 장녀 생각에 눈물을 많이 흘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추운 날씨에 구치소 생활을 하는 딸을 걱정하며 할일이 태산 같을 대그룹의 총수가 가급적 외부 활동도 자제하고 있다고도 전해진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보면, 물의를 일으켜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회사에 큰 손실을 입힌 임원을 대하는 그룹 총수의 자세가 아니라 어린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만이 읽혀진다.
대한항공과 조양호 회장과 조현아 전 부사장만이 이렇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자녀 동일체’ 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 문화의 특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바로 이 사건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일 뿐이다. 사실 ‘부모-자녀 동일체’ 문화는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 못지않게 긍정적인 측면도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문화적 특성이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은 그 특성이 조직의 안위에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혼란스럽다면 그래도 제일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이다.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일군 가업을 제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잘났거나 못났거나 자식 밖에는 없다는 의식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과연 오늘날에도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효율적이고 타당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오늘날의 재벌그룹은 총수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수없이 많은 주주들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그룹이 존재할 수 있도록 이용하고 지켜준 국민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룹의 경영과 임원의 선발은 형식적으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시늉만 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주주들의 의사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영자의 선발의 잣대는 그룹 창시자의 가족이냐의 여부보다는 경영 능력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그룹 총수의 자녀라 할지라도 엄정한 훈련을 받은 결과 당당히 능력을 인정받아 임원이 된다면 훨씬 더 통솔력도 커지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