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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에 담긴 이야기] 연산군과 '흥청망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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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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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에 담긴 이야기] 연산군과 '흥청망청'

조선왕조 10대 왕 연산군. 자신을 낳아준 엄마 ‘윤씨’가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사실을 왕이 된 후에 알게 되면서 많은 신하를 죽이고(갑자사화) 폭군으로 돌변한다. 결국 이복동생인 중종에게 쫓겨나서 강화도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사연 많은 왕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연산군 시절에 다양한 말들이 등장한다.

연산군 옆에는 늘 바른 말을 하는 내시 ‘김처선’이 있었다. 세조 때부터 역대 왕들을 보필해 온 이런 김처선을 연산군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래서 ‘입 다물고 혀는 깊이 간직하라’라는 글이 적힌 신언패(愼言牌)를 만들어 내시들 목에 걸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궐 밖 여인들을 탐하다 못해 신하들의 첩까지 범하자 참다못한 김처선이 끝내 충언을 한다. 화가 난 연산군은 그 자리에서 김처선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처선의 ‘처’자가 들어있는 사람이나 사물 이름은 모두 바꾸라 명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궁궐연회에 자주 선보이던 ‘처용무’였는데, 연산은 이를 <풍두무>로 즉시 고쳐 버렸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여탐은 가히 광기 수준에 이른다. ‘채홍사’라는 관리직을 만들어서 이들로 하여금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얼굴이 예쁜 처녀들을 협박과 돈으로 회유하여 연산군의 전속 기생으로 만들어 버린다. 채홍사가 데려온 여자들은 ‘장악원’이란 곳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제일 먼저 궁중 예법을 익히게 되며 이런 여인들을 운평이라고 불렀다. 운평 중에서 왕을 모실 수준에 이른 여자들을 선발하여 ‘흥청’이라 했으며 흥청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즉 가까이에서 단지 연산군의 수발을 드는 여인은 ‘지과흥청’이라 하고, 동침한 흥청을 ‘천과흥청’이라 했다.

연산군은 틈만 나면 이들 흥청과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에서 배를 띄워 놓고 음주가무를 자주 즐겼다. 흥청이 많을 때는 2000명이 넘었다고 하니, 조금 과장된 듯해도 연산군의 방탕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나랏일은 돌보지 않고 ‘흥청’들과 놀아나다가 반정으로 쫓겨나자 당시 사람들은 연산군이 흥청이와 ‘흥청거리다 망했다’고 하여 ‘흥청망청’이라는 말을 만든다. 오늘날에 와서는 ‘흥청망청거리다’ 혹은 ‘흥청거리다’의 의미는 돈이나 물건을 헤프게 쓴다거나 기분에 취해 함부로 행동하는 모습을 빗대서 하는 말로 다소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다.

폭군 연산이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내게 되는 바탕에는 그의 남다른 서정적 감각도 한 몫을 하게 된다. <연산군일기>에 남아있는 그의 100편이 넘는 시와 절구가 이를 잘 말해 준다.

‘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인생은 풀잎의 이슬 같아서, 만남의 시간도 많지 않구나.)
연산군이 반정 직전에 쓴 시인데,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해서 짠한 느낌이 든다.
홍남일 한·외국인 문화친선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