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현대극 페스티발(PADAF) 출품작으로 노을 소극장에서 공연된 『유리구두』가 재공연 되었고, 『휘파람부는 날』과 『상실의 새』는 신작이다. 출연진들이 모두 여성들인 세 작품은 탁월한 기량으로 ‘현대 여성들의 미의식’, ‘부딪치며 크는 청소년들의 모습’, ‘30대 여성들의 성 정체성과 상실감’을 현대무용의 특질을 세련되게 잘 표현해내었다.
다양한 이미지와 상징들로 채워진 욕망, 빨간 립스틱과 빨간 구두가 대변한다. 여자는 거울 들여다보며 화장을 한다. 여자는 나서지만, 자신을 압도하는 무수한 경쟁자들이 존재한다. 스스로 위축되고 파생된 열등감은 과시의 대상을 찾게 되고, 유리 속에 비친 빨간 구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인다. 촉발된 욕망은 위선과 가식의 궤도로 진입한다.
안무가는 이 작품을 통해 여자들의 내면을 표현한다. 여자들의 날씬해지려는 욕망, 다이어트에 대한 진솔한 주장들이 쏟아져 나오고, 빨간 구두에 대한 경배는 끝나지 않는다. 존재함으로 꿈꾸어야하는 여자들의 욕망은 인간들의 일차적 욕망과 연결선상에 있다. 욕망이 깃들어 있는 여성, 그 건너편의 시선에 걸린 욕망은 무한하다.
안무가 최효진에 의해 포획된 ‘욕망’은 ‘비범’이 되는 단계를 밟는다. 이 작품은 ‘욕망’의 비참한 이면을 읽게 한다. 여전히 차가운 도시의 한 모퉁이에서 삶의 욕구, 욕망과 갈망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그 ‘욕망’은 비우지 않고서는 해결책이 없다. 현대무용에 대한 존엄과 유쾌한 희극성을 추구한 이 작품의 상상력을 눈에 띈다.
『휘파람부는 날』은 경쟁사회 속, 십대 하이틴들의 일상을 통해 그들의 고민과 희망을 그린 작품이다. 청소년의 꿈을 상징하는 작은 화분 속 푸른 나무에 물 조리개로 물을 주면서 춤은 시작된다. 흔들리지 않으면서 크는 나무는 없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는 10대들의 경쟁, 청소년 스타 춤꾼들인 김현아, 김선경 등의 참여로 빛나는 일면을 보인다.
최효진은 심리묘사를 원색으로 차용하기를 즐겨한다. 다양한 색의 청소년들은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위해 경쟁한다. 그런 모습들은 서로 등을 맞대거나 당기거나 미는 동작으로 나타난다. 역동적 동작들이 빚어내는 움직임들은 십대들의 춤이라고 믿기 어려운 대담하고도 조화를 이룬 춤이었다. 고난이도 춤으로 관객을 현혹하는 춤을 우회, 싱그러움을 공감하는 춤이었다.
솔로, 두엣, 삼인무, 사인무, 오인무, 육인무로 변형되면서 영역을 확장해내는 춤은 경쾌한 현대무용 에세이를 펼치게 된다. 등을 맞댄 채 앉아서, 일어서며, 서서 가위바위보 승부가 나지 않아 몸으로 부닥치는 모습이 보인다. 그 사이에 또 물 조리개가 등장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성장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통과의례가 끝나면 화사한 십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나무에 대한 관심 지속되면서, 춤꾼들은 포즈를 달리하며 자신들의 매력을 하나씩 드러낸다. 그들의 동작은 과감한 스트레칭, 물구나무서기, 빠른 턴, 일체감 만들기 등 기본기를 탄탄하게 하는 과정을 거쳐 왔다. 춤으로 자신들의 성장의 나이테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끝까지 나무를 주시하고 관심을 갖는다. 나무에 비눗방울을 불어넣고 제의를 하듯 춤은 확장된다.
격렬한 춤들이 끝나고 쓰러진 그들 위로 주인공 김현아는 비눗방울을 분다. 나무, 그들 모두에게 축복과 행운을 비는 의식으로 춤은 마무리된다. 그들은 명랑하게 청춘을 보내고 있으니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열기와 힘, 세련된 기량으로 과감으로 빚어낸 춤은 군더더기 없는 묘사로 ‘휘파람부는 날’의 상쾌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다.
『상실의 새』는 30대 중반 여성들의 정체성 위기와 상실감을 다룬 춤이다. 이면우의 시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를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쓸쓸한 가을 풍경을 연상 시킨다. 잃어버린 청춘을 아쉬워하며 써낸 3인3색(3人3色)의 춤은 흐르는 세월의 무게를 촘촘히 엮어낸다. 어느 날 찾아 온 믿기지 않은 삼십 중반의 나이는 위기감을 불러오고 도전은 시작된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작품에 스며들면서 ‘상실감’의 진행은 깊이감을 더해간다. 세 여인, 성유진(붉은 색), 박희진(검정 색), 최효진(보라 색)은 자신의 드레스로 자신의 심상을 표현한다. 『붉은 의자위의 꿈』에 이어 굵은 선으로 묘사해낸 『상실의 새』는 소품으로 색감, 감도, 계절을 흐름을 감지케 하며 원초적 본능의 문제까지를 포괄하는 사과를 사용한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춤 이외에도 다양한 오브제와 퍼포먼스를 곁들인다. 천으로 가려져 있던 상자, 천이 벗겨지면서 그 정체를 드려나며 진행되는 행위, 사과를 베어 물고 뱉고, 바닥에 흩어진다. 여인들이 가졌던 꿈의 파편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하나씩 망가진 인생의 얼룩이 드러남을 상징한다. 얼룩은 씻으면 없어지고, 앙금은 풀면 없어진다. 허전하지만 세월은 약이다.
이면우의 시에 깊이 침착(沈着), 몰입한 최효진은 새들의 울음, 그 안에서 이는 바람의 줄기를 타고 인연의 소중함을 그려낸다. 그녀는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누구하나 먼저가면 잊자고 서둘러 잊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는 면에 주목한다. 단지 잠시 잊혀져 있었을 뿐, 사과처럼 던져져 없어지는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봄밤의 열기를 끌어올린 출연기자들은 『유리구두』의 최효진, 조가람, 김현아, 이한나, 『휘파람부는 날』의 김선경, 방효정, 김현아, 양하영, 한예진, 이세림, 황현지, 한민주, 『상실의 새』의 최효진, 성유진, 박희진으로 이들이 앞으로 만들어 나갈 춤 무대는 기존 춤들의 경계를 허물고, 춤판에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며, 현대무용의 빛나는 영역을 차지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장석용 객원기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