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20세기의 풍경, 리본을 들고 춤추는 남자, 테드 숀의 흑백영상이 투사된다. 가벼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강하고 분명한 현대무용의 새로운 조형에 대한 선언이다. 붉은 탑 조명 안에서 춤추는 여인, 정은주가 독무로 추어내는 리본 댄스는 대 스승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보헤미안의 모습이다. 음악 없이 침묵 속에 작은 움직임이 모여 변화를 이루어내는 단계이다.
경쾌한 선율이 번지면서 탑 조명 안으로 들어오는 하이 키 라이트, 정은주는 테드 숀의 분신이 되어 리듬체조 선수 같은 몸짓으로 섬세함과 굵은 선을 연기한다. 독백은 리본 댄스에 대한 경배가 된다. 리본 댄스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조형은 국가대표 리듬체조 선수 출신인 정은주에 의해 최적의 조합을 이룬다. 제자리를 벗어난 그녀는 다시 붉은 탑 조명 사이를 오간다.
나비가 되기 전의 애벌레의 기다림과 고난 부분을 하얀색 리본과 함께 안무로 구성하고, 이후 나비가 되면서 매여져 있던 리본은 풀리며 나비를 표현한다. 리본은 무엇인가를 제지하고 자유로움을 방해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활용된다. 그녀는 리본을 풀면서 사회나 제도, 현실을 옥죄고 있는 무엇인가로부터의 압박이나 구속에서 자유로워짐을 표현해낸다.
플레인과 탑을 오가는 조명, 음악이 고조될수록 조형의 감도는 높아지지만 또한 선구자들이 겪는 고독이 비쳐진다. 상상이 불어오는 너른 들판에서 리본 없이 춤을 추는 여인, 음악이 멈춰서고 열린 무대에서 햇살(HKL)이 비쳐온다. 새로운 춤이 탄생한 것이다. 나비의 탄생이다. 나비와 리본 춤을 병치시키면서 근대의 풍경은 부드럽고 강하게 각인된다.
그녀가 의미 규정으로 내세우는 세 개의 탑 조명은 애벌레에서 성충,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부가적으로 표현한다. 드뷔시, 에릭사티, 필립 그라스와 성신여대 겸임교수이자 작곡가인 조윤정의 ‘여름비’와 ‘여명’이 음악으로 사용된다. 의상은 하얀색으로 레이어가 살짝 겹쳐서 감싸있는 애벌레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헐렁하고 편안한 튜닉 스타일로 자유로운 나비를 상징한다.
느린 걸음으로 등을 보이며 걸어가면서 공연은 종료된다. 정은주의 모습은 마음속 테드 숀을 흠모하는 열정과 엄숙함이 공존함을 입증한다. 그녀가 어떤 전의를 불태우는지는 몰라도 정은주는 찬 아침과 뜨거운 밤으로 번갈아 담금질하며 그 뜻을 기리는 여전사이다. 그녀의 『붉은 나비의 꿈』은 조택원이나 최승희의 초창기 춤 기록을 발견한 것 같은 흥분이 이는 공연이다.
정은주, 따스하고 냉정함을 동시에 소지한 춤꾼이다. 그녀는 이화여대 학사,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원(CalArts) 석사, 단국대에서 무용학 박사를 취득하고 단국대, 서울공연예고에 출강하고 있다. 그녀는 늘 싱그러운 꿈을 꾼다. 훤칠한 키에 싱겁지 않고 자기 안무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은 귀감으로 삼아야할 현대무용가의 덕목이다. 그녀의 연구에 경의를 보낸다.
장석용 객원기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