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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 지혜는 삶의 실패까지 인정할 때 생기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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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 지혜는 삶의 실패까지 인정할 때 생기는 선물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62회)] 노년기와 지혜

인생을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만 재단할 때 절망감 들어

청년기도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 필요
“나이가 들면서 지능은 떨어지고 지혜는 는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젊었을 때는 기억을 잘 했는데 나이가 들어서 자꾸 잊어버린다”는 말을 한다. 그 사람의 젊었을 시절을 모르기에 참말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본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 젊었을 때는 참 총명했는데 나이 들더니 멍청해졌다”는 말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혜는 나이가 들면서 정말 느는 것일까? 동화책을 보면 산신령은 항상 백발이 성성한 나이 지긋하고 수염이 긴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현자(賢者)나 종교지도자들도 하나 같이 나이 지긋한 노인의 모습이다. “철들자 노망(老妄)난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지혜는 아무래도 나이가 들고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에 얻어지는 소중한 결정체(結晶體)라는 인상이 짙다.
지혜는 지식이나 독특하고 성공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겸손의 바탕위에서 지금까지 외면했던 자신의 삶의 단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생기는 선물이다. 힌두교인들이 히말라야 카트만두에 있는 가네쉬 사원에서 지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지혜는 지식이나 독특하고 성공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겸손의 바탕위에서 지금까지 외면했던 자신의 삶의 단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생기는 선물이다. 힌두교인들이 히말라야 카트만두에 있는 가네쉬 사원에서 지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뉴시스
철학이나 종교에서 지혜에 대한 관심은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철학자나 종교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도 뭔가 범인(凡人)이 갖지 못한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겸비한 지혜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인상이 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동네에서도 삶에 지친 보통 사람들이 결혼이나 이사 혹은 사업 등의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철학관’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곳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지혜(智慧)’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고 측정하고 경험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지 않다. 심리학 분야에서도 지혜에 대한 연구의 역사가 짧다보니 아직까지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정의(定意) 자체도 찾기 쉽지 않다. 어떤 학자는 “중요하지만 불확실한 인생사(人生事)에 대한 현명한 판단과 충고”라고 지혜를 정의하고 있고, 또 다른 학자는 “역설(逆說)에 대한 이해, 모순(矛盾)에 대한 화해 및 타협의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생애발달심리학자 에릭슨(Erikson)은 지혜를 “죽음에 직면해서 나타나는 삶 자체에 대한 지식과 초연한 관심”으로 정의하였다. 이 정의들을 종합하면 지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나름 열심히 살아온 삶이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를 얻는 데 노년기가 유리한 점이 있다. 즉, 삶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장기나 바둑 실력이 정확히 똑 같은 친구 갑, 을, 병 세 사람이 있다고 치자. 먼저 갑과 을이 게임을 하고 병은 옆에서 관전을 한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제일 수를 잘 볼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보면 실력이 똑 같으므로 어느 누구도 수를 더 잘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장기나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누구나 알듯이 이 상황에서는 병이 제일 수를 잘 본다. 그리고 실수나 묘수를 알려주려는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오죽하면 “뺨 맞으면서 훈수 든다”는 말이 다 있겠는가?

하지만 갑 대신에 병이 직접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 옆에서 볼 때는 그렇게 잘 보이던 수가 안 보이고 실수와 패착을 연발하게 된다. 이번에는 옆에서 경기를 관전하는 갑이 수를 잘 본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어느 경기에서나 직접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보다 옆에서 관전하는 사람이 훨씬 더 수를 잘 본다는 것이다. 선수 출신의 해설자는 지금은 작전이 잘 보이는데 왜 선수일 때는 안 보였는지 의아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바둑이나 장기와 같은 오락이나 운동 경기뿐만 아니라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그렇게 쉽게 보이는 데 정작 자신의 삶은 왜 그렇게 어렵고 막막하기만 할까?

다른 사람의 삶이나 경기를 관전할 때는 직접 참가할 때는 가지기 어려운 승패를 괘념치 않는 마음가짐과 심리적 거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경기의 승패에 집착하기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경기 자체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의 승패에 집착하면 할수록 자신의 수에만 관심이 집중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게임을 볼 수 있는 시야가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바둑이나 장기도 선수가 아닌 관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실력인데도 훨씬 더 잘보인다. 지난 2010년 10월 국회 의원회관 가페테리아에서 열린 국회의원 친선 바둑대회에서 이재오 특임장관이 훈수를 하고 있다.이미지 확대보기
바둑이나 장기도 선수가 아닌 관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똑같은 실력인데도 훨씬 더 잘보인다. 지난 2010년 10월 국회 의원회관 가페테리아에서 열린 국회의원 친선 바둑대회에서 이재오 특임장관이 훈수를 하고 있다.
노년기는 삶이라는 경기의 승패에서는 어느 정도 물러나있는 시기이다. 또 물러나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노년들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노욕(老慾)’ 이나 ‘노탐(老貪)’ 이란 말도 바로 젊었을 때의 삶의 모습에서 여유를 가지고 한 발짝 물러날 줄 아는 노년기의 지혜를 갖추지 못한 노년을 일컫는 말이다. 젊었을 때는 자신이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승리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경기에 임한다. 그 과정에서 이기기 위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불필요한 치기(稚氣)를 부리기도 한다. 덕분에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노년이 되면 삶의 경기장에서 한발 물러나서 인생 전반을 총체적으로 관조하고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이 상태는 마치 친구들이 바둑을 둘 때 옆에서 관전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경기에 임하는 당사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심리적 여유를 가지는 시기이다. 더군다나 노년기는 죽음과 제일 가까이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는 크게 보이고 굉장히 중요하게 보이던 인생사(人生事)들이 이제는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된다. 따라서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깊고 넓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도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자동적으로 지혜가 는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나이를 헛먹었다”라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나이가 든 연장자라 할지라도 상식적으로 도저히 지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노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에릭슨에 의하면 노년기에 지혜라는 미덕을 갖추기 위해 노인들은 ‘자아통합’이라는 발달과제를 잘 해결해야만 한다. 자아통합은 죽음을 앞두고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공한 일뿐만 아니라 실패하고 실수한 일까지도 자신의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과거에 성공한 일은 다소 과장하면서 자긍심(自矜心)을 지키기 위한 자료로 사용한다. 필요할 때마다 이 자료를 꺼내서 사용한다. 반대로 실패하거나 부끄러운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려고 할 뿐만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밀어넣고 애써 외면하면서 마치 자신의 삶이 아닌 것처럼 여기고 살아간다.

자랑스럽게 회상하면서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부분보다 감추고 외면하고 살아온 부분이 더 많으면 노년기에 ‘절망감’을 느끼며 살게 된다. 자신의 일생이 실패한 삶이었다는 자괴감이 드는 동시에 다시 만회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없다는 현실에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노인들은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며 원망하게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불평을 한다. 삶이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니고 부당하다고 느끼게 되면 다시 기회를 잡고 더 성공해서 결국 자신이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느끼려고 노력한다. 이 현상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감정이다. 이런 노년들은 계속 삶 자체를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바라보게 되고 실패한 삶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다.

지혜는 결국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졌거나 남이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하고 성공적인 경험을 많이 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겸손의 바탕위에서 지금까지 외면했던 삶의 단편들을 결국 자신의 삶이었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생기는 선물이다. 동시에 젊은이들도 자신이 몰두해있는 삶에서 여유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심리적 거리를 얻을 수 있는 노력, 즉 직접 경기를 하면서도 관전자의 관점을 가지도록 노력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덕성(德性)이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이미지 확대보기
한성열 고려대 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