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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에 담긴 이야기] 두문불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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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에 담긴 이야기] 두문불출하다

이성계에 반대한 '두문동 선비'들의 죽음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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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불출을 한자 뜻풀이로 보면 닫을 두(杜), 대문 문(門), 아니 불(不), 나올 출(出)이다. 즉 ‘대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다.’ 또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고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가 된다.
이 말의 유래는 조선왕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와 가깝게 지내던 중국의 원나라가 새롭게 등장한 명나라에 점점 밀리게 되자, 고려는 원나라를 도우려고 이성계 장군을 보내서 명나라를 치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나 압록강의 ‘위화도’까지 갔던 이성계는 계속된 장마에 발목이 잡히자 당장 명과 싸움을 해서는 안 되는 네 가지 이유(4대 불가론)를 주장하며 군사를 이끌고 수도 개경으로 돌아와 버린다. 이것을 역사책에는 ‘위화도 회군’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임금의 명령을 어겼으니 반역임에 분명한데도 당시 많은 군인과 젊은 학자들은 이성계의 편을 들어 회군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당시 고려는 기득권을 가진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원성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영 장군은 어떤 명분으로도 반역은 있을 수 없다며 이성계와 맞서 싸우다가 잡혀서 유배를 당하고, 뒤이어 고려왕조도 멸망하고 만다.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정하고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최영 장군과 같은 마음을 가진 선비들도 부지기수라 개국 초기의 혼란은 쉬이 수습되지 못했다.

선비들의 크고 작은 저항 사례 중에 대표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두문불출’ 사건이다. 국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유생과 태학사들이 관복을 벗어 던지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은둔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장소는 지금의 북한 개풍군 광덕면에 있는 광덕산이었는데, 자신들이 있는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 별칭하며 외부와 연락을 끊어버린다. 이에 당황한 태조 이성계는 사람을 보내서 끊임없이 회유를 하지만 황희와 몇몇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요지부동이라 결국 포기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의 아들 이방원은 두문동 학자들을 모두 죽이자고 했지만 이성계는 펄쩍 뛰면서 반대를 했다. 이때 조선창업에 동참했던 배극렴이 죽이지는 말고 산에 불을 질러서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자는 묘안을 낸다. 이 제안에 태조와 신하들이 찬성을 했고 즉시 군사를 보내서 두문동 일대에 불을 지폈는데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두문동 학자들은 연기와 불길 속에서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똘똘 뭉쳐 모두 타죽고 만다. 죽은 사람을 헤아려 보니 72명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화가 치밀어 자신의 대는 물론이고 100년 동안 개성 출신의 학자들을 관직에 등용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다. 이후 출세 길이 막힌 개성 사람들은 장사에 눈을 돌려서 돈 많은 개성상인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태조의 명령이 있은 지 300년이 지난 정조 시대에 두문동 학자들의 넋을 기리는 사당 ‘표절사’를 지어서 후대 귀감으로 삼게 하였다.

두문동 사건이 있고 나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두문불출’이 회자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