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가르침도 각자가 주체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인생의 의미는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동시에 우리들의 일상의 삶이 소중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해준다. 당연히 삶의 의미와 방향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의 필수 요소이다. 그런데 사는 의미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배로 말하자면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는데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목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표가 없으니 방향을 정할 수 없고 그냥 물결 따라 흘러가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열심히 살아갈 이유도 없고 에너지도 없이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심리학자 바우마이스터(Baumeister)에 의하면 의미의 본질은 ‘연결(連結)’이다. 즉, 서로 다른 두 개를 연결하여 새로운 관련을 맺을 때 의미는 생성된다. 예를 들어 보자. 사랑하는 두 젊은 연인이 길거리 노점에서 싸구려 커플반지를 사서 함께 끼었다고 하자. 싸구려 반지와 두 사람이 연결되면 그 반지는 ‘두 사람의 애정’을 상징(象徵)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둘도 없는 소중한 물건이 된다. 이미 같은 종류의 반지와는 전혀 다른 물건이 되고 다른 반지로는 대체할 수 없는 귀한 의미를 가진 특별한 물건이 된다. 당연히 반지 그 자체에 원래부터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애정이라는 상징이 그 반지에 주어지면서부터 그 반지는 소중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어느 물건이나 대상의 가치는 물리적 속성이나 이미 내재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나 대상에 부여하는 심리적 의미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의 삶에서 의미를 가져야 할 제일 중요한 대상은 바로 삶 그 자체이다. 왜 사는지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것도 삶의 의미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결정해주는 것도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의미를 찾고, 또 찾아야 하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일관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자신의 삶이 가치 있다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고 싶어 하고, 또 그럴 때에만 효능감과 삶에 대한 통제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제일 강조한 학자는 프랭클(Victor Frankl)이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정신과 의사인 그는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새로운 심리치료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시작으로 3년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모진 노동과 극심한 배고픔,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육체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극심한 불안감 속에서 인간으로서 맛볼 수 있는 제일 극심한 심리적 고통까지 경험했다.
이 수용소 경험을 통해 그는 ‘의미’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똑같이 혹독한 물리적 환경 속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지만 살아야 할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국 살아남았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더욱 건강하지만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가 큰 영향을 받았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설파한 것처럼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이겨나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확신했다. 강제수용소의 경험을 통해 그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동기는 ‘의미에의 의지(will to meaning)’라고 주장했다. 인간 실존의 가장 근원적 동기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어떤 고통과 고난도 이기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랭클에 의하면 우리의 삶 자체에는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내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의 의미는 내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마치 싸구려 반지 자체에 이미 정해져 있는 내재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지에 내가 어떤 의미를 주느냐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겨지거나 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소위 ‘현자(賢者)’를 찾아 방황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meaning seeking)은 이미 존재하지만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그 무엇을 찾는 것(meaning finding)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meaning making)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우리가 삶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반지에게 “너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오히려 반지가 우리에게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나 철학이 삶의 의미를 가르쳐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특정 종교에 귀의하거나 철학 서적을 탐독하기도 한다. 물론 종교(宗敎)는 한자어가 말해주듯이 ‘으뜸 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으뜸가르침은 아마도 삶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일 것이다. 하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종교 안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에 걸맞은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이성적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현실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지는 못 한다.
그것은 자신이 애써 만든 삶의 의미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삶의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지에는 ‘영원(永遠)’을 의미하는 보편적 상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변치 말자는 의미로 결혼 예물로 반지를 주고받고, 연인들이 커플링을 끼고 다닌다. 하지만 아무 반지나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람이 서로 주고받을 때 그 당사자에게만 그 의미가 있을 뿐이다. 즉, 보편적 상징은 구체화될 때만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만 그것은 사랑의 징표로 두 사람을 엮어주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것이 각자의 삶에 큰 의미를 지니려면 각자가 주체적으로 자신이 만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아무리 삶의 의미에 대한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것을 체화(體化)하고 자신만의 의미로 만들었을 때에만 그 가르침은 삶의 목표를 정하고 고난 속에서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작품에서 이런 체화의 과정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의미 없는 ‘하나의 몸짓’을 향기 나는 아름다운 ‘꽃’으로 만드는 이름붙이기는 의미 만들기에 다름 아니다. 오늘도 인생은 우리에게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의미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모두 ‘꽃’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다만 우리가 알맞은 이름, 즉 의미를 만들어 줄 때에만 그렇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 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