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리뷰] 이해준 안무의 『트라우마 3.0』

하얀 밤이 지속되고 있는 백지의 공간은 언뜻 보아서 누구에게나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타불라 라사(Tabula Rasa)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그 어두운 공간의 깊이감을 실은 ‘침묵’(II. Silentium. Senza Moto)으로 신비감이 스며들게 한다. 부드러운 선율에 맞춘 상황 전개는 무기력증의 일면을 느리게 환상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속을 만큼 묵시적 상징으로 보여준다.
상상의 정신병동의 풍경, 폭력과 좌절이 뒤범벅된 그 한가운데 몽환의 판타지를 떠올리게 하는 비정상적 심리적 반응은 무용수들은 고도의 테크닉으로 의외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이해준의 이전의 트라우마에서 진화된 『트라우마 3.0』은 관객들이 출구가 없는 한낮의 어둠을 미학적 정교함으로 장치시킴으로써 소외감과 외면의 감정을 관객들이 ‘아름다움’으로 오인시키는 효과를 창출한다.

춤 담론으로 전개시킨 『트라우마 3.0』은 감각이 외부의 대상세계에 반응하여 관념이 생기기 이전의 인간정신 상태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정신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칠판에 비유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 De anima’나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춤 버전이라 칭할 수 있다. 백지상태로 태어난 인간은 경험을 통해 감정을 배우고 자신을 형성한다. 두뇌회로가 잘못 꼬이면 다시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해준은 정신적 후유증의 다양한 형태를 춤의 디테일에 담고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차용하여 관객들을 깨어있게 만든다. 부드러운 음률이 띄우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현대적 사운드와 블루를 주조로 한 차가운 현대에 얽힌 추억은 반어적 기법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즐겨 우화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퍼포먼스성을 가미해 왔다. 『트라우마 3.0』은 작품은 그런 작위적 요소를 배제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차림한다.
이번 작품을 통해 안무가는 자신의 안무노트처럼 충격적 사건으로 인한 집단 트라우마와 어떠한 사건 이 후 보이지 않는 규율 부가와 규율 받음, 그 역(役)의 전복, 사회와 구성원 사이 내재한 요구와 폭력, 그 어둠 속 발가벗겨지고 망가지는 인간 존재들의 관계를 어떤 아이디어의 시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적 풍경과 극적 구조를 통해 춤과 행위성을 섞어 음영 짙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안무가가 보여준 기하학적 구조 공간에 적합한 무브먼트, 정신세계의 오묘함을 부각시키는 창조적 조명, 몸이 소품이 된 효율적 공간 배치, 트라우마를 진화시킨 적합한 사운드, 춤의 미장센은 트라우마의 종결편이 새로운 ‘트라우마’류의 작품 생산과 그 가시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어서 이 작품의 활용 가능성이 주목된다. 인접 장르와의 크로스 오버를 즐겨해 온 이해준이 정제한 이번 작품은 안정감을 불러왔다.
『트라우마 3.0』은 뒤로 물러서서 느긋하게 상황을 관조하는 작품이다. 춤의 핵심인 세 가지 주제, 기교, 구성에 있어서 이 작품은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주제인 ‘상흔’에 관한 기억으로 적절하였고, 이윤경, 이다애, 조윤정, 최은지, 박관정, 강지현, 이현진, 김준영, 윤희섭의 춤 테크닉은 깔끔하였으며, 구성은 군더더기 없이 이미지 상으로 간결했다.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작품은 현대무용의 의미있는 성취였다.
이해준, 아침을 가리는 옅은 안개들을 제치고,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안무가이다. 이해준의 인격과 실체가 투명한 물고기처럼 부각된 작품은 시간을 두고 다가오는 사진을 보는 즐거움이나 팔색조로 차려지는 육류가 던지는 미감처럼 유쾌하다. 그가 세상의 모든 고통을 껴안고 부댖끼는 것도 수행의 일부이겠지만, 노자의 전망을 가진 안무가로써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자신도 즐겼으면 한다.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