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은 1999년 12월 8일, 9일 문예회관대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2001년 문예회관 대극장, 2002년 일본 아오야마 극장, 2002년 하바로브스크 오드라 극장, 2005년 호주 디킨 대(大), 2008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등 국내외 공연에서 버전을 달리하며 그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탄탄한 구성으로 중앙아시아 한민족 애환의 누적층을 돌다리 놓듯 쌓아나간 그간의 작품은 눈물이 침화된 소금꽃의 결정이었다.
안무가 박명숙은 자신의 『유랑』을 소금꽃으로 피어난 사람들을 위한 진혼(鎭魂)이라 규정하고 어둠속에서 사라져간 고려인을 추모하고,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경건한 위무(慰舞) 의식을 감행한다. 안무가·교육자로서 박명숙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길이 어쩜 유랑의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길을 떠나는 그녀가 ‘수난과 영광의 유민사-신순남 展’을 보고 느낀 감동과 충격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살고 있던 30만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 중 강제이주가 시작되기 전 지식인층 2800여명은 이미 총살되었으며, 어떤 마을은 하루 전에야 이주 사실을 통보받아 짐을 쌀 새도 없이 가족과 생이별한 채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어디로 가는지 영문도 모르고 맨몸을 맡겨야 했다. 배고픔과 추위에 견디지 못한 아이와 노인들이 죽어 열차 밖으로 던져졌고, 한 달 만에 겨우 도착한 이들을 맞은 것은 중앙아시아의 바람과 황무지뿐이었다.
그들은 땅굴을 파고 갈대로 지붕을 올려서 바람과 눈을 피했다. 낯선 땅에서 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그들에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투쟁이었으며 영광이었다. 그들은 이듬해 봄부터 황무지를 논밭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소련이 1991년 해체되면서 독립국가등의 자국민 우월정책에 밀려 고려인들은 다시 시련의 길을 떠나야 했다. 60여 년 동안 땅을 일구었던 중앙아시아를 떠나 그들이 떠나왔던 그 땅, 연해주로 6000여㎞나 되는 그 먼 길을 다시 되 돌아가야만 했다.
이 작품은 유민사의 비극을 모티브로 약 2년간의 작품 구상과 준비를 거쳐 ‘고려인 중앙아시아정주 60주년’을 기념하여 초연되었다. 박명숙은 ‘까레이스키 중앙아시아정주 70주년’을 앞두고 비극의 역사 앞에 헌무(獻舞)를 올린다. 2015년의 『유랑』은 강제이주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선조들을 추모하는데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 인식에 미흡한 이들에겐 영약(靈藥)과 같은 자극과 그 슬픔을 꿰고 있는 사람들에겐 아린 감동을 안길 것이다.
박명숙은 ‘한민족 유민들의 삶이 질곡(桎梏)의 역사 속에 잊혀 진 역사가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멕시코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들의 삶에서 오늘도 여전히 진행형으로 있는 우리의 역사라는 인식에 공감하며, 전 지구적으로 무한경쟁의 시대에 들어 선 오늘날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공동체와 문화, 역사로부터 분리되거나 추방된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어 유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박명숙 안무의 무용극 2015 『유랑』은 무용극의 특질을 살려 약속의 땅이 되지 못했고, 의지할 사람들이 없었던 선조들의 수난의 연속에서 튼튼한 조국, 든든한 믿음의 고리가 되는 존재가 되자고 강조하고 있다.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조상들의 땀방울과 눈물을 생각하며 만들어낸 작품이 가을의 미토스를 넘어 희망의 지표로 삼을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유민들이 써 낸 극기의 역사와 현존의 모습에서 박명숙의 2015 『유랑』의 희망을 읽을 수 있다.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