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 문제 경제적으로만 다뤄선 부작용 해소 못해
의학을 전공하고 생물학에 조예가 깊었던 프로이트가 성욕과 더불어 공격욕을 행동의 기저에 있는 중요한 욕구로 꼽은 것은 사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진화론(進化論)’을 주창한 다윈(Charles Darwin)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자손(子孫)을 많이 번식시키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자손을 많이 번식시키려면 무엇보다 먼저 각각의 개체가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나는 ‘개체보존(個體保存)의 욕구’다.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마음에 드는 짝을 찾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개체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하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개체를 공격하여 물리쳐야 한다. 이런 행동의 배후에 있는 욕구를 프로이트는 ‘공격욕’이라고 불렀다.
성욕과 마찬가지로 공격욕도 다양한 행동으로 표출된다. 어린이들이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면 공격욕이 ‘재미’의 중요한 원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서로 도망가고 따라가고 껴안고 뒹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한다. 비록 상대방을 해치려는 의도에서 하는 행동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른들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상대방을 툭툭 치면서 웃는 사람도 많다. 이런 공격행동은 살아가는 데 지장을 주지 않고 오히려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공격행동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범죄행동이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가장 나쁜 범죄로 꼽는 것은 ‘살인(殺人)’이다.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 특히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인 범죄자를 가장 중형(重刑)으로 처벌한다.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정당한 이유 없이 해치는 경우 ‘폭력’으로 규정하고 중벌을 가한다.
공격욕도 성욕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공격욕 자체가 없으면, 즉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면 결국 그 종(種)은 멸종하게 된다. 다만 사회가 원만히 유지되고 원활히 기능하기 위해서는 공격욕은 ‘승화(昇華)’된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승화된 공격욕이 표출되는 행동이 ‘운동(運動)’이다.
소위 모든 스포츠의 기저에는 공격욕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우리나라가 강세를 보이는 종목, 즉 양궁, 권투와 펜싱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양궁은 원래 전쟁에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활쏘기’가 승화된 모습으로 변형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궁의 원래 의도는 적군, 즉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펜싱의 원형은 ‘칼 쓰기’다. 칼을 사용하는 원래의 이유도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권투(拳鬪)의 기본은 ‘때리기’다. 권투의 요체는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것’이다. 즉,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권투 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권투선수를 ‘폭력배(暴力輩)’로 매도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 처벌하기는커녕, 막대한 경제적 보상을 하면서 더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여 우리가 보는 앞에서 상대방을 때려눕히라고 응원까지 한다.
동일한 행동이라고 해도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으슥한 야밤에 골목에서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것은 ‘폭력’이 된다. 당연히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은 ‘범죄자’가 되고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상대방을 때려눕히면 그것은 ‘스포츠’가 되고, 그런 행동을 효과적으로 하는 사람은 ‘영웅’이 된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유명한 소설가 이병주님(1921-1992)님의 유명한 명언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표현을 빌린다면 “드러내놓고 때리면 영웅이 되고, 숨어서 때리면 폭력배가 된다”.
중요한 차이는 사회의 인정(認定) 여부다. 즉, 승화된 형태로 나타나는지 혹은 원시적인 모습으로 거칠게 나타나는지의 여부다. 공격욕은 개인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인이다. 그것이 없다면 개인과 사회 자체가 유지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선악(善惡)의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공격욕이 선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교육하고 보상한다. 반대로 악하게 표현되는 경우 억제하고 처벌한다.
스포츠 외에 공격욕이 승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중요한 영역이 ‘일’이다. 일은 ‘삶의 만족’과 직결되어 있다. 사회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의 결과에 따라 보상하는 체계를 정교하게 갖추고 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경구는 그래서 나타났다. 하지만 일은 단지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얻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일은 그 자체로 우리의 본능적 욕구인 공격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유용한 수단을 제공해준다. 다시 말하면, 대가를 받지 않아도 우리는 열심히 일한다. 일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일이 공격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죽인다”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훌륭한 일의 결과를 보고 감탄하면서 “죽인다”고 표현하다. “네가 이렇게 만들었니? 정말 죽인다”라고 말할 때 문자 그대로 그 일을 한다는 사람의 목숨을 뺏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할 때 정말 오늘 목숨을 끊어도 좋다는 의미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일을 통해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을 때도 공격욕의 극단적 형태인 ‘죽임’을 이용해 표현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공격욕은 ‘일’을 통해 승화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이슈 중 하나는 ‘실업(失業)’의 문제다. 일하고 싶어도 일 할 곳이 없는 상황은 단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살펴볼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가장 본질적인 공격욕이 승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얼마나 잘 처리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개인과 사회의 존립이 달려있다. 특히 청년 실업의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촌각(寸刻)을 다투는 시급한 문제다. 청년기는 공격욕이 제일 왕성한 시기이고, 이 공격욕이 승화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면, 이는 곧 개인과 사회에 해(害)가 되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 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