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75회)]내가 아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닐 수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백조'도 방황하고 아파했던 '미운 오리들'자신이 현재 알고 있는 내 모습이 진정한 '나'인가 묻고 또 물어야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은 지금도 많이 회자되는 명언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고 싸움을 하면 당연히 이길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 자신을 알아라’라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어보면 그만큼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자신을 정확히 잘 알게 된다면 구태여 이런 경구가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기 어려운 것인가? 우리 신체 중에서 우리를 제일 정확하게 증명해주는 부분은 얼굴이다. 특별한 언급이 없더라도 모든 서류에 ‘증명사진’을 붙이라면 어김없이 모든 사람이 ‘얼굴’ 사진을 붙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역설(逆說)이 있다. 얼굴이 우리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부분이지만 사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보고 간접적으로 자신의 얼굴의 생김새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거울이나 거울의 기능을 하는 물체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얼굴의 정확한 생김새를 모를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잘 생겼다는 것은 절대 모를 것이다.
만약 거울이 얼굴을 정확히 반영해주지 않는다면 어떨까? 어린이들이 즐기는 공원에는 볼록거울과 오목거울이 있다. 볼록거울 앞에 서면 우리 모습이 배불뚝이가 된다. 오목거울 앞에 서면 배가 홀쭉한 모습의 우리가 있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변형된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 하지만 사실은 웃고 지나갈 수만은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울이 일관되게 우리 얼굴의 한 부분을 왜곡해서 비춰준다면 아마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생겼다고 믿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얼굴은 거울에 비친 모습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가령 철수는 자신이 매우 착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철수는 어떻게 자신이 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영자는 자신이 매력이 없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영자는 자신이 매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간단히 대답한다면,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방식은 마치 거울을 보고 우리 얼굴 모습을 아는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거울에 비치는 우리 모습을 보고 알 수밖에 없다. 만약 거울에서 아름답게 비춰주면 우리는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마찬가지로 거울에서 밉게 비춰주면 우리는 밉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그렇다고 믿게 된다.

먼저, 알에서 부화된 ‘미운 오리’는 자기가 오리인지 백조인지 또는 다른 종류의 새인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소위 ‘자기개념(自己槪念, self-concept)’이 없다. 그러면 자기가 오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될까? 어미 오리나 주위에 있는 다른 오리들이 ‘오리’라고 알려주고 그렇게 키우니까 자기가 오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제일 먼저 우리를 키워주는 부모가 알려줘서 알게 된다.
그러면 자기가 ‘미운’ 오리인 것은 어떻게 알까? 그것도 처음에는 자기가 미운 오리인지 예쁜 오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옆에 있는 다른 오리들이 “너는 미운 오리야”라고 놀리자 자기가 미운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호수에 비친 자기의 모습과 다른 오리들의 모습과 다른 것을 깨닫자 자기가 미운 오리라고 확신하게 된다. 만약 이때 다른 오리들이 “너는 예쁜 오리야”라고 부러워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호수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 다른 오리들과 다른 것을 보고 “내가 다른 오리들보다 특별히 잘 생겼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미운 오리’가 미운 오리가 되는 것은 주위에서 ‘미운’ 오리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결국 주위의 다른 오리들은 ‘거울’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밉다’는 것은 다른 오리들의 평가이고, 그 평가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의미한다. 즉, 거울의 역할을 하는 다른 오리들이 ‘밉다’라고 거울에 비쳐주자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미운 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똑같이 80점을 받은 철수와 창수가 있다고 가정하다. 90점은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철수 어머니는 “더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철수에게 여러 번 타일렀다. 하지만 철수가 계속 80점을 받자 “너는 공부를 못 하는구나”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급기야 “너는 머리가 나쁘다”라는 판단을 한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동안 철수는 자신이 공부를 못 하고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창수 어머니는 80점을 공부를 잘 하는 증표로 생각하고 창수에게 “너는 공부를 잘 하는구나. 머리가 좋은 모양이다”라고 칭찬한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창수는 자신이 공부를 잘 하고 머리가 좋다고 믿기 시작한다. 철수와 창수가 자기가 공부를 잘 하는지 못하는지에 대해 가지는 ‘자기관(自己觀)’은 80점이라는 점수보다 그 점수에 대해 반응하는 어머니들의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의 자기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상을 ‘중요한 타인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부모, 형제, 친구, 배우자, 직장동료 등이다. 자신이 훌륭한 남편인지 아닌지의 판단에는 아내의 반응이 큰 영향을 미친다. 훌륭한 부모인지는 자녀들의 반응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외에도 사회적 평가나 비교 등도 후에는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특히 어렸을 때 형성된 ‘나’는 더욱더 부모나 교사의 평가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 외부의 판단과 교육에 의해 형성된 ‘미운 오리’는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백조’로 변할 수 있다.
이제는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자신을 형성해가는 것이 아니라, 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 ‘미운 오리’에서 ‘아름다운 백조’로 변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고난의 여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주위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하늘을 나는 백조들은 모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고민하고 아파했던 미운 오리들이다.
우리는 오늘도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진정한 ‘나’인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불교에서도 ‘진정한 나(眞我)’를 찾으라고 가르친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외부에서 주어지는 보상과 처벌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마도 제일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너 자신을 알아라’라는 경구는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