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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605)] 소설가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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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605)] 소설가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날씨가 추우면 잔치국수를 좋아하는 나도 간편하게 후루룩 먹을 수 있는 라면이 먹고 싶어진다. 라면도 유행이 있어서 남자라면, 참깨라면을 먹다가 요즘은 오모가리 김치찌개라면에 밥을 말아먹으며 한 끼를 때울 때가 있다. 소설가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라는 갓 끓인 따끈따끈한 라면같은 신간도서가 나왔다.

'라면을 끓이며'는 '밥벌이의 지겨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바다의 기별'에 실린 산문과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픈 그의 바람이 담긴 최신 글들을 보태어 엮은 산문집이다. '밥, 돈, 몸, 길, 글'의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김훈 작가는 치열한 글쓰기로 '서재는 막장(탄광)과 같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대학에서의 전공이 정치외교학과이며, 기자라는 이력때문인지 그의 문체를 읽으면 작가라는 사람들은 언어의 정수를 찾아내는 더듬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늘 그렇게 살아가는 익숙한 일상을 이토록 낯설고 사랑스런 눈으로 뚫어지도록 바라볼 수 있을까? 그 느낌을 이토록 절제된 언어로 공감을 줄 수 있을까?라는 점이 김훈 작가의 문체의 탁월한 힘이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라면, 밥, 그리고 돈, 그 개별적이면서도 전체의 삶과 연결된 삶의 본질적인 상징물과 이들을 타인과 연결하여 소통하는 신호를 소재로 육순의 작가가 풀어놓은 일상의 이야기가 마음을 두드리며, 때로는 피식 웃음을 웃게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라고 일침을 가해 마음을 긴장시키기도 한다.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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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일 때 나는 미군에게 얻어먹던 내 유년의 레이션 맛과 초콜릿의 맛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계장의 닭들과 사지를 결방당한 과수원의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들과 양식장에서 들끓는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는 36억 개 라면의 그 분말스프의 맛을 생각한다. 파와 계란의 힘으로 조금은 순해진 내 라면 국물의 맛을 36억 개 라면에게 전하고 싶다.(p31)

라면은 1963년에 탄생하여 산업화 세대를 먹여 살린 음식이었고, 낱 개로 포장되어 개인의 배고픔을 채우면서도 규격화되고 대량생산되는 산업화시대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1963년 이후부터 줄곧 우리의 먹거리로 함께 하면서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모습과 닮아 있는데 오늘날도 라면은 다양한 종류와 다양한 가격으로 계층이 나뉘는 우리 사회를 투영하며, 삶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있다. 또 미래에도 변해가는 우리 삶의 모습을 담으며 함께 할 것이다.

'식사하셨어요?'로 시작되는 인사말,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것은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일이다.', '한 솥 밥 먹는다.', '밥이 보약이다.', '밥줄이다.'라고 다양하게 표현되는 밥은 우리에게 음식 이상의 정서적 유대감을 준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 밥 한 공기로 충족되는 삶의 만족감, 삶에 대한 의지, 집 밥에 담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함축하고 있다. 김훈은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삶의 본질을 명확하게 꿰뚫고 있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모든 '먹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떨구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 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내 밥벌이가 아니다.(P71)

라면과 밥으로 상징되는 삶을 지탱하는 돈에 대해 수표 20만원을 책 속에 숨겨두었다가 잊어버린 일화를 통해 살아가는 일의 세속성에 공감하며, 피식 웃다가 스마트폰 진동으로 전해지는 간절하고도 아름다운 신호가 가슴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에서 삶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읽는다.

얼마 전 '명경만리-착한 소비의 미래'라는 다큐프로그램을 보았는데 2015년 트렌드로 많이 쓰인 단어를 뽑아보면 담배값, 메르스, 금수저, 전세, 아이폰 등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고통체감지수는 사람들이 삶이 힘들다고 느끼는 정도를 수치화한 것인데 22%로 높다. 이렇게 살기 힘들다고 느끼는 가운데 익명의 사람들이 좋은 가치를 위해 움직이는 이상한 흐름의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흐름을 '착한 소비'라고 한다.

강남역 지하철에는 '달콤창고'라는 달콤한 간식들로 가득찬 특별한 사물함이 있는데, 이름 모르는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간식을 낯모르는 사람들이 먹고 위로 받으며, 자신도 다른 간식과 위로의 글을 남겨 전달한다. 또한 서스펜디드 커피는 커피 1잔 마시고 2잔 값을 내고 행운을 빈다는 메시지를 남기면 다른 사람이 한 잔을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커피 한 잔의 행복을 전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착한 움직임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제 사람들은 상품이 아닌 나눔이라는 가치를 사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착한 소비는 SNS에 의해 확산되고 소통하며 우리가 사는 사회를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꿔가고 있다.

이러한 세상을 바꾸는 좋은 흐름들을 보면서 함께 밥먹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안도현의 '연탄 한 장'이라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 나 아닌 그 누구에게 /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 생각하면 / 삶이란 /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안도현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中에서)

살갗을 에이는 추운 날 라면냄비를 가운데 두고 늘 익숙하여 잠시 잊었던 소중한 사람들, 소중한 기억들, 소중한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가족과 도란도란 나누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며 책장을 덮는다.
김희지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 진로독서연구소 연구위원(동광중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