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어진 수명만큼 보람 있어야 진정으로 오래 사는 것이 축복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무색하게 우리나라만 해도 요즘에는 평균수명 자체가 80세가 넘었다. 이제는 주위에 90세가 넘었지만 정정하게 활동하고 계신 어른신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는 정정하신 90세 이상의 어르신을 만나는 것이 하나도 희귀하지 않은 다반사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 고령화사회로 진입하였고 2018년에 고령사회로, 그리고 이 추세대로라면 2026년에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이 예상된다. 유엔은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고령화가 진행된다면 2050년에는 노인 인구 비율이 37.3%로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렇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90세 이상의 정정한 어르신을 만나는 것이 일상인 현실에서는 우리의 전체 생애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틀도 바뀌어야 한다.
이미 말한 대로 나이 들어가는 것을 ‘성장’과 동일시하고, 청춘을 인생의 정점이라고 여기는 틀은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 이제는 나이 들어가는 것을 단지 ‘변화(變化)’라고 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의 생애를 바라보아야 한다. 생애를 단지 변화의 연속이라고 바라보면 특정한 어느 시기가 다른 시기보다 더 빠르거나 더딘 변화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애의 모든 시기가 각각 동일한 양으로 변화해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각 시기에는 긍정적인 변화도 있지만 동시에 부정적인 변화도 있다. 즉 새롭게 얻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신체적인 변화처럼 태어나서부터 빠른 속도로 변화하다가 청년기 이후에는 멈추는 변화도 있지만 지혜와 같은 심리적인 현상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관되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는 변화도 있다. 또한 영적(靈的)인 변화처럼 어린 시절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로 나타나다가 중년기 이후에야 크게 증가하는 변화도 있다.
근육도 팽팽하고 활력도 넘치는 신체적인 영역은 젊었을 때 정점을 이루고 이후 점차로 쇠퇴해가지만, 반면에 삶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좋은 대인관계를 맺는 능력은 청년기 이후 오히려 증가한다. 체력적인 면에서의 부정적인 변화는 심리적인 면에서의 긍정적인 변화로 인해 상쇄된다. 노년기에 이르면 신체적인 면에서는 계속 부정적인 변화를 보이지만 영적인 면에서의 긍정적인 변화는 오히려 노년기를 더욱 빛나게 한다.
이처럼 ‘변화’의 틀로 바라보면 우리 삶의 각 시기는 그 시기 나름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은 서로 보완(補完)하면서 각 시기를 독특한 모습으로 꾸며준다. 동시에 각 시기는 서로 다른 특징을 나타내며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게 해준다.
이처럼 나이 드는 것, 즉 발달을 ‘성장’이라고 보는 인식틀과 ‘변화’라고 보는 인식틀은 우리 생애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성장’의 틀로 보았을 때는 긍정적으로 평가받던 것이 ‘변화’의 틀로 바라보면 오히려 부정적인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서른 살 어른이 함직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열 살 어린이가 있다고 하자. 이 어린이는 정상적으로 발달하는 것인가? 아니면 비정상적인 발달을 하는 것인가? 발달을 ‘성장의 틀’로 바라보면, 어린이가 어른처럼 행동하면 “어른스럽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왜냐하면, 어른이 어린이보다 더 많이 성장한 더 바람직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이 어린이는 동년배보다 빠르게 발달하고 있는 것이고, 당연히 긍정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변화의 틀’로 바라보면 빠르게 발달한다는 것은 조숙(早熟)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조숙한 것은 조로(早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다운 순진한 맛이 없이 너무 되바라졌다”라든가 “애늙은이 같다”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어린이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고, 그 특징이 잘 드러나는 것이 정상적인 발달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기를 지난 삶을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흔 살을 먹은 사람이 마치 20~30대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한 평가도 어떤 틀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성장의 틀’로 바라보면 나이 든 사람이 청년처럼 사는 것이 바람직하고, ‘나이보다 젊게 보인다’는 것이 덕담이 된다. 왜냐하면 청년기가 삶의 정점이고 제일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시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의 틀’로 보면 “나잇값도 제대로 못 한다”다거나 “나이를 헛먹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노년은 노년 나름의 특징을 잘 드러내면서 지혜롭게 사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편의상 60세 환갑을 노년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제 우리는 노년으로 30년 이상을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노년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삶의 평가를 달리 하게 된다. 만약 노년기를 ‘쇠퇴(衰退)’의 시기로 바라본다면, 우리 모두는 아무리 젊음에 탐닉하고 그 시기를 붙잡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한다고 해도 결국 노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말년의 30년 이상을 쓸모없고 쇠퇴한 늙은이로 젊은 시절의 향수에 젖어 살 수밖에 없다.
과일도 하우스에서 인공적으로 제철보다 빨리 재배한 것이라든지 철이 지난 끝물의 과일보다 자연에서 ‘제철’에 익은 것이 제일 맛이 있듯이, 우리의 삶도 조숙하거나 미숙한 것보다 제 나이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제일 아름답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청년은 청년답게, 중년은 중년답게, 그리고 노년은 노년답게 행동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고 제일 아름답다.
우리 모두는 오래 살고 싶어한다. 노인분들이 “나이 들면 죽어야 돼”라고 하시는 말씀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길어진 수명이 보람있고 즐겁고 의미가 있어야 진정으로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위에는 나이 드는 것을 서글퍼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젊게 보이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하지만 영원히 오래 사는 것은 헛꿈에 불과하다. 오래 사는 것을 원하면서도 나이가 드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모순(矛盾)일 뿐이다.
수명이 길어진 21세기에는 오래토록 젊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보람있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현명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장의 틀’을 벗어버리고 ‘변화의 틀’로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한다. 우리의 생애가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 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