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어리 먼저 풀어주고 조언과 충고 해줘야 효과
필자가 어렸을 때에는 서울에 특수초등학교는 ‘서울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와 ‘서울교육대학부속초등학교’ 두 곳이 있었고, 사립초등학교나 특수초등학교는 없었다. 그리고 두 초등학교는 미리 입학시험을 보고 합격한 학생만이 다닐 수 있었다.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자부심은 매우 높았다.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필자도 한 곳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았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학교에 안 가는 것이 처음에는 좋았지만 제일 고역은 같이 놀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하교한 후에야 같이 놀 수 있으니 결국 오전에는 혼자 심심하게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다시 한번 또 다른 특수학교에 도전한 필자는 다행히 이번에는 합격이 되어 일년 전 불합격의 상처를 씻고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일종의 재수를 한 셈이었다.
자부심을 가지고 신나게 학교 다니면서 즐겁게 생활하던 중 5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갑자기 온몸에 빨간 반점이 생기는 희귀병인 자반병(紫班病)에 걸렸다. 피가 나면 빨리 멎지 않는 증상이 나타나는 이 병 때문에 필자는 5학년 2학기부터 6학년 1학기까지 거의 일 년 동안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 입학시험을 보아야 했고, 전국의 모든 중학교에서는 동일한 날에 동일한 시험문제를 가지고 입학시험을 보았다.
당시에는 소위 명문 중학교라고 불리는 학교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었고 가능하면 명문중학교에 입학하려고 공부를 잘 하는 모든 초등학교 학생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절이었다. 일 년 가까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필자가 평소에 마음속으로 정해둔 학교보다 서열이 몇 단계 낮은 학교에 응시를 했음에도 또 불합격하고 말았다. 이때 필자가 겪은 마음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말 죽고 싶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때 절절히 경험했다.
또다시 재수할 수 없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2차로 시험을 치르고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교생활과 공부에 전혀 재미를 붙일 수가 없었다. 이 학교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다닐 학교가 아닌 것 같았고, 같은 반 학우들이 전혀 내 수준에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항상 외톨이로 생활했다. 때마침 찾아온 사춘기와 겹쳐서 필자의 중학교 시절은 그야말로 반항과 울분과 자포자기로 엉망이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려고 좋은 조언과 충고를 해주셨고, 심지어는 야단도 치시고 체벌까지 하셨지만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생활을 하던 필자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고 하늘을 원망하면서 반항심만 키워주었다.
그렇게 재미없이 중학교 3학년 1학기까지 학교를 다니던 중 어느 날 혼자 교실에 남아서 소설책을 보고 있는데 복도를 지나가시던 교감선생님이 필자가 혼자 교실에 있는 것을 보시고 문을 열고 오셨다. 교감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려고 엉거주츰 일어나면서 ‘오늘은 교감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겠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오신 선생님이 예상과는 다르게 조용히 필자를 안아주셨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성열아, 아직도 마음이 그렇게 아프니?” 이 말씀을 듣자 갑자기 설움이 북받치면서 참을 수 없는 통곡이 쏟아져나왔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교감선생님의 이 말씀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통곡을 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교감선생님의 품에 안겨서 엉엉 큰소리를 내며 통곡을 한 후 울음이 잦아들자 교감선생님이 다정하시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성열아, 분단된 조국 산하를 바라보면서 슬픈 민족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라.” 그 말씀의 의미가 정확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예”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교감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신 후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던 필자에게 갑자기 큰 깨달음이 왔다.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구나.” 그 후 필자의 학교생활은 크게 변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 시절에는 고등학교도 다시 시험을 보아야만 다녔다. 그리고 공부를 잘 하면 원했던 고등학교에 응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은 이 일이 있기 전에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포자기로 생활하던 필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러 필자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교수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필자에게 한 가지 중요한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앞으로 꼭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큰 과업이 기다리고 있는 나라이다. 그렇다면 심리학자로서 무언가 준비할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학부와 대학원에 ‘통일심리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대학원 학생들과 같이 이 주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2년 7월 14일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분단의 아픔을 조금 더 생생하게 느끼고자 판문점을 방문했다. 필자도 그때 처음으로 판문점을 방문했다.
분단의 조국의 현실을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판문점에서 별 생각 없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인지 내 마음속에서인지 구별은 안 되지만 큰 소리가 들려왔다. “성열아, 분단된 조국 산하를 바라보면서 슬픈 민족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라.” 바로 38년 전 교감선생님이 필자를 안아주시면서 해주신 말씀이었다. 너무나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교감선생님은 물론 아무도 필자 옆에는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만났던 교감선생님, 그리고 선생님의 말씀은 그 후 거의 잊혀진 듯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었다. 하지만 그 말씀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살아 있다가 교수라는 여건이 갖추어지자 ‘통일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생생하게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교감선생님의 말씀은 38년이 지난 후 판문점에서의 놀라운 경험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교감선생님과 관련된 이 두 번의 놀라운 경험은 그 후 필자의 심리학 교수가 되기까지, 또 된 후에도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열등감과 반항심으로 철부지 생활을 할 때 교감선생님을 만나는 사건이 없었다면 필자는 아마도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때 만약 교감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처럼 조언과 충고나 혹시 야단을 치셨다면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 후 필자와 비슷한 경험을 한 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한 경험에 의하면 결론은 ‘아니다’이다. 진정한 변화는 감정의 응어리가 풀릴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먼저 응어리가 풀리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조언과 충고가 따라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순서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 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 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