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 덜 주는 것 실험으로 입증
부지기수로 일어나
때로는 생각 바꿔보는 게 어떨지
하지만 이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이 일어난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38명의 이웃 주민이 비명 소리를 들었고, 도망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녀의 모습을 35분 동안 창문을 통해 지켜보았지만 주민들 중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녀를 공격한 범인은 두 차례나 그녀를 내버려두고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 과정에서 이웃 중 누구라도 그녀를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면 그녀가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니면 최소한 주민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경찰에 전화로라도 신고하는 수고를 하였더라면 그녀는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38명의 살인 목격자 중 아무도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Thirty-EightWhoSawMurderDidn’tCallthePolice).’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뉴욕타임즈’에서 기사를 내보내면서 전국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고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사람이 한 여성이 살해당하는 동안 그 광경을 목격한 많은 이웃 중 한 사람도 직접 도움을 주거나 단순히 전화로 신고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과연 이 이웃들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간들인가?
물론 사건 발생 40여 년 후인 2007년, ‘뉴욕타임즈’ 등 이 사건을 대서특필한 언론 보도는 많이 과장되었다는 것이 상세한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독자나 시청자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언론은 자극적으로 제목을 뽑아야 하기 때문에 과장해서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처음의 보도처럼 사건의 목격자가 38명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처음 범인이 제노비스를 폭행했을 때 그녀를 내버려 두라고 고함친 사람도, 경찰에 신고한 사람도 분명 있었다. 일부 목격자들도 여자의 비명을 듣고 창밖을 어렴풋하게 보긴 했지만 그것이 살인 사건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목격자들은 연인끼리의 사소한 다툼으로 여겼다고 후에 진술했다.
어쨌든 대부분의 목격자들이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에 신고하는 수고조차 안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범인조차 1977년 ‘뉴욕타임즈’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저지른 사건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누군가 나서서 도와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는 뻔뻔스러운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이웃의 불행에 이처럼 무관심하게 된 이유를 다각도로 찾았다. 대도시의 특징인 익명성을 원인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도시는 농촌 지역과 달리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적다. 예를 들면,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위 아래층에 서로 오고가며 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는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도 많다. 많은 비평가들이 만약 이 사건이 이웃과 왕래가 잦은 소도시나 농촌 지역에서 발생했다면 서로 앞 다투어 도와주려고 나왔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비정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원래 비정하고 무심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대도시라는 환경이 사람들을 비정하고 무심하게 만드는 것인가?
1968년 사회심리학자 달리(JohnDarley)와 라타네(BibbLatane)은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유명한 실험을 고안했다. 그들은 목격자들이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은 대도시의 비정함이나 주민들의 무감각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미 경찰을 불렀을 거라는 추측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했다. 그들은 이 현상을 ‘방관자(傍觀者) 효과’라고 부르고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그들은 방관자 효과는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더 강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가정했다. 즉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덜 줄 것이라고 가정했다.
달리와 라타네의 실험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구내전화를 이용한 집단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도록 유도되었다. 토론을 진행하던 중 상대편 참가자가 갑자기 발작을 시작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이 상황은 사전에 미리 준비된 것이었지만 참가자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 토론팀의 일원이라 생각하도록 유도되었던 참가자들은 대부분 도움을 주는 행동을 제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1 대 1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유도된 참가자들은 상대방이 발작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감지했을 때 거의 모두가 도움을 요청했다. 즉 달리와 라타네의 가설은 지지되었다.
그들은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방관자 효과가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를 ‘책임감 분산(分散)’에서 찾았다. 책임감 분산은 상황의 모호성과 더불어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도움을 주겠지 하는 심리적 요인 때문에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가리킨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실험들에서 혼자 있을 때는 85%가 도움을 주는 반면, 두 명이 있을 땐 62%, 네 명이 있을 땐 31%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책임감 분산 현상은 다양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방관자 효과가 일어나는 이유로는 ‘변명의 정당성’이 있다. 사후에 도움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설명할 때 여러 사람이 있었던 상황과 혼자 있었던 상황은 크게 다르다. 혼자 있는 상황에서는 도움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있었을 경우에는 도덕적 책임까지도 분산되는 효과가 있다. “다른 사람들도 도움을 주지 않았잖아!” 하는 변명을
통해 어느 정도 책임감을 모면할 수 있다.
방관자 효과는 ‘상황 인지의 부정확성’에서 생길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인지해야 한다. 예를 들면, 공원에서 젊은 남녀가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젊은 남녀가 서로 아는 사이인지, 또는 젊은 연인들의 ‘사랑싸움’인지에 대해 분명한 판단이 서야 한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지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다. 만약 다른 사람들도 아무런 도움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은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인 경우에는 자기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이럴 경우에는 일단 도움을 주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훨씬 현명할 경우가 많다.
일상생활에서 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많은 부모들의 고민은 아무리 좋은 조언을 자녀들에게 해줌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자녀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 자녀들의 성품이 나쁘다고 화를 내고 포기하기보다는 혹시 조언을 많이 해주기 ‘때문에(because of)’ 자녀가 부모의 조언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은 아닌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한번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함에도 불구하고’가 기대했던 효과가 없을 경우에는 반대로 ‘…하기 때문에’로 전환해서 생각을 다시 해보아야 한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