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른 듯이 보이지만, 우리의 사회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제일 많은 입양아를 외국에 보내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변화를 촉구한다. 이제는 우리도 먹고 살만하니 우리 자식들을 외국에 보내지 말고 우리가 소화해서 잘 키워야 한다면서 우리의 입양문화에 대해 한탄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자체적으로 어린이를 입양할 수 있다면 구태여 외국에 어린이를 보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 입양문화가 활성화되지 않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입양을 보내는 현상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왜 우리는 입양을 망설이는지에 대해 그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더 시급하다.
혈연관계 중시하는 한국문화
다른 피 섞이면 안된다는 의식
국내입양 뿌리 못 내리는 원인
가족의 중심축을 부자(父子) 관계에 두는 우리 문화에서는 혈연관계를 중시한다. 그리고 그 혈연관계는 조상과 자손을 연결시켜주는 제일 중요한 고리라고 생각한다. 혈연관계의 핵심은 ‘피(血)’이다. 우리처럼 ‘피로 맺어진’ 관계를 중요시하는 문화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제일 믿을 수 있는 관계는 ‘혈맹(血盟)’ 관계다. 그리고 혈맹관계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하는 관계다. 이처럼 피를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당연히 가족관계는 ‘하나의 피’ 즉 한 조상의 피가 면면히 흘러내려와야 한다. 아직도 자신을 소개할 때 “청주 한씨 OOO파 28대 손입니다”라고 해야 뼈대 있는 집안 자손이라고 인정받는 정서가 남아있다.
이렇게 피로 맺어진 관계에서는 당연히 ‘순혈주의(純血主義)’가 강해진다. 순혈주의는 사전적으로는 “순수한 혈통만을 선호하고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인 혈통은 배척하는 주의”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순혈주의가 팽배한 문화에서는 같은 피를 나눈 ‘내집단’에 대해서는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강하고, 모든 이득을 독점적으로 공유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단지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온갖 특혜를 주고받는 것이 당연시되기도 한다. 반면에 피를 나누지 않은 ‘외집단’에 대해서는 백안시하고, 차별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을 좋아하는 문화에서 만약 입양을 통해 ‘다른 피’가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 입양이라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피’에 ‘뿌리도 알 수 없는’ 피가 섞이는 것을 의미한다. 설사 같은 조상의 자손을 입양한다고 해도 이미 ‘우리 집안’의 순수함에는 결정적 하자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자식을 입양하여 호적에 올린다는 것은 그 대(代)부터 집안의 피가 자랑스러운 조상의 피와는 단절되고 다른 피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 대부터 이미 ‘순혈’이 아니라 ‘잡혈(雜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죽어 조상을 뵐 면목이 없는 짓’이다. 이런 문화에서 입양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피는 아버지를 통해 이어지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입양을 하여 ‘잡혈’이 되는 것보다는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라도 아들을 얻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 자식은 비록 ‘서자(庶子)’이기는 해도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순혈을 지킬 수는 있다. 이처럼 순혈을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부모가 다 왕계에 속하면 ‘성골(聖骨)’, 부모 중 한쪽만 왕계에 속하면 ‘진골(眞骨)’ 등으로 구분하였다. 요즘도 부모를 잘 못 타고 났다고 자조적으로 자신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잡골(雜骨)’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순혈주의가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정치세계에서도 마찬가지 문화적 현상이 나타난다. 1차대전 이후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 체제를 근간으로 의회정치가 발전해온 영국이나 공화당과 민주당 체제로 의회가 발전해온 미국과 달리 수시로 분파를 거듭하는 한국 의회정치에서도 자신의 정당의 뿌리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견 이율배반적이기까지 하다. 정당의 역사를 연구해온 전문가가 아니면 혼란스러울 정도로 계속 이합집산을 거듭해온 현재의 정당들도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찾아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정치계에서도 순혈주의가 크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피는 ‘성(姓)’씨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성이 같고 본관이 같으면 친족으로 인정한다. 지금도 본관과 성이 같은 사람들끼리 이름자로 항렬을 알아보려는 것을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다. 오죽 피를 중요하게 여겼으면 ‘동성동본(同姓同本)’ 끼리는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제도까지 생겨났을까?
다른 정당사람 장관자리 주면
순수한 정당성 훼손으로 여기고
자신들 기득권 위해 강력 반대
한국 정당의 파벌은 우두머리의 성씨를 중심으로 구분된다. 문제인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정치인들은 ‘친문(親文)’이고, 그렇지 않은 정치인들은 ‘비문(非文)’이나 ‘반문(反文)’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친박’과 ‘비박’으로 나뉘어 끊임없는 정쟁을 일삼았다. 비록 국가 권력을 쥐고 있지는 못하지만 야당에서도 당권을 쥐고 있는 대표를 중심으로 ‘친대표계’와 ‘반대표계’로 나뉘어 투쟁을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협치는 마치 입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입양하는 것이 ‘잡피’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정당의 사람들과 함께 내각을 구성한다는 것은 마치 내각의 순수한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마치 ‘종자(種字)’가 다르기 때문인 것처럼 치부하게 된다. 피로 뭉친 ‘내집단’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피가 수혈되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한다. 동시에 내집단원들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감싸게 된다.‘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집단원 한 사람이 비난받는 것은 마치 모든 집단이 공동으로 비난받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총동원하여 내집단원을 감싸고 돈다.
협치는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협치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집단을 이룰 수 있는 포용성이 있어야 된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는 격언을 선거유세에서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끼리 나뉘먹기에도 부족한데 왜 남에게도 주느냐’는 식의 ‘끼리끼리’ 문화에 길들여져 있으면 계속 분쟁과 분파만 생길 뿐이다.
가정과 학교에서부터 ‘협치’를 배우고 훈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녀가 부모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얼마든지 존중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