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판단 기준은 단지 육체적인 면에만 국한할 문제는 아니다. 조금 더 상징적으로 범위를 넓히면 심리적 죽음, 사회적 죽음, 영적 죽음 등 다양한 죽음이 있다. 예를 들면, 갓 국회위원이 된 젊은 정치가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젊은 국회의원은 정치인으로서 큰 재목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치인이 한 순간의 판단 실수로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려 정치계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그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단언했다. 즉, 그가 위대한 정치인의 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잠재력을 더 이상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취직 어려우니 결혼‧출산 포기
저생산성‧저성장 악순환으로 연결
기초 욕구마저 위협받는 게 현실
이처럼 잠재력의 실현이 멈춘 상태를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예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거나 또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도 다 비록 목숨은 부지하고 있지만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 거부당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는 한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려는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본능(本能)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강할 뿐만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에게도 자신의 타고난 잠재력을 실현하려는 욕구가 있다. 이를 ‘자기실현(自己實現)’의 욕구라고 한다. 자기실현은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능력 등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 노력한다.
안타깝게도 누구나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모두가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실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는 내적 외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욕구들이 어느 정도 만족되어야 한다. 이 기초적인 욕구들로는 생존, 안전, 소속, 인정의 욕구 등이 있다.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살아있어야 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하고, 또 살아남아야 한다.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이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도덕과 윤리는 생존 이후에 따질 일이다. 그 아름다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일단 생존의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되면 안전하게 살려는 욕구가 생긴다.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려고 한다. 또한 저축이나 보험 등도 안전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제도적 장치이다. 종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각 개인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돕고 거기에 소속된 사람들 전체를 의미 있는 하나로 느끼게 함으로써 안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남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조직이나 가정을 꾸리려는 소속의 욕구를 느낀다. 결혼을 하여 배우자를 얻거나 친구 등을 만들려고 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받고 포용되는 것을 통해 자기가 가치 있다는 것을 느끼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속의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되면 사람들은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생긴다.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 한다. 그러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열중한다. 자기의 능력이 다른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인정되고 좋게 평가 받기 때문에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란 느낌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기초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된 후에야 자기실현의 욕구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실현의 욕구를 강하게 느끼지 못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간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분야에서 잘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잠재력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사회가 인정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좋은 부모‧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생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안전한 삶보다 미래 투자에 나서
자기실현을 어렵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안전의 욕구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넓은 길보다는 좁은 길로 가라”는 격언이 있지만, 좁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불안함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패해도 또 다른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용기와 믿음의 기반 위에서만이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즉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
좋은 가정은 자녀들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여건을 만들어주는 곳이다. 생존과 안전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도 부모에게 인정받는 경험을 하는 어린이는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용기가 생긴다. 부모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해도 믿고 도와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부모는 비록 안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있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더라고 자녀들에게 내색하지 않는다. 자녀들이 마음 놓고 잠재력을 실현하도록 해주려는 배려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생존과 안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보장제도가 완비되어 있어야 하고, 복지제도가 원활히 시행되어야 한다. 그런 기초적인 여건이 마련되어야만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즐겁고 보람 있게 ‘잘 사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심리적으로 지나치게 불안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물리적인 생존과 안전의 보장만큼 중요한 것이 심리적인 생존과 안전이다. 객관적인 현실이 안전하더라도 주관적으로 그렇게 느끼지 못하면 자기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단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착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려는 욕구를 포기하고 사는 삶은 심리적으로는 ‘죽은’ 삶이다. 그런 삶은 결코 즐겁지 않다. 젊은이들이 결혼과 자녀 양육을 포기하는 사회도 ‘집단 자살 사회’이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적성과 잠재력보다는 안전을 우선하는 직업을 택하려고 하는 사회도 결코 바람직한 나라가 아니다. 이런 나라는 심리적으로 ‘집단 자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한 나라는 출생률이 저하되어 망할 수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죽어서 망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가 심리적으로 ‘집단 자살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