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엄’한 아버지는 어떤 모습의 아버지일까? 일반적으로 ‘엄하다’라는 말은 ‘무섭다’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그만큼 두 단어는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해 일반적으로 ‘무섭다’. 대개의 경우, 아버지는 무섭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치신다. 그리고는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시곤 종아리를 때리기도 한다. 결국 엄한 것은 무서운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처벌이 따르는 것이다.
'엄하다'는 것은 일관성 있다는 뜻
규칙 정하면 일관되게 적용
초지일관이 진정으로 '무서운 것'
‘엄하다’는 것은 ‘일관성이 있다’는 뜻이다. 한번 규칙을 정했으면 일관되게 그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고, 그 규칙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녀와 하루에 얼마동안 게임을 할 것인지에 대해 규칙을 정했으면 그 규칙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엄한 것이다. 집에 손님이 왔거나, 여행 중이라도 한번 정한 규칙을 초지일관(初志一貫) 지키는 것이 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소리를 내지 않고도, 심한 처벌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엄’할 수 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도 있듯이, 진짜 무서운 사람은 자신에게 ‘엄’한 사람이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담배를 즐긴 아버지가 새해가 되어 자녀들 앞에서 ‘금연’한다는 것을 공표했다고 하자. 가족들은 그렇게 호언장담했지만, 사실은 작심삼일(作心三日)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정말로 금연을 하면 그때부터 자녀들은 “아버지가 ‘무서운’ 분”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한 번 한다고 하면 하는 분’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한 약속을 이행하려고 노력한다. 아버지가 무서운 분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慈)’해야 한다. ‘자’의 의미는 ‘사랑하다(愛)’이다. 그래서 ‘자애(慈愛)’로운 어머니가 바람직한 어머니이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인정이 많고 깊은 어머니이다. 엄한 것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인정이 깊다’는 것은 규칙을 지키지 않아 야단을 맞거나 처벌을 받아 마음이 상해 있는 자녀에게 잘못을 용서하고 따뜻하게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는 의미이다.
규칙을 엄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우리 삶이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혹은 임의로 규칙을 어길 경우도 있다. 비록 규칙을 어기는 것이 나쁜 것인줄 알지만 여러 이유로 어길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처벌을 감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규칙을 어기는 것 자체가 양심에 저촉되는 것이고, 처벌을 받는 경우 마음이 상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는 무조건 엄하며 어머니는 무조건 자애롭기만 하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버지도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로봇’이 아니다. ‘정상참작(情狀參酌)’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하지만 가능하면 자신이나 타인에게 규칙을 일관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어머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항상 용서해주고 보듬어줄 수는 없다. 때에 따라서는 아버지보다 더 엄하게 자녀들을 훈육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용서하고 상한 마음을 배려해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아버지의 엄함 속에는 자애로움이 스며있어야 하고, 동시에 어머니의 자애로움 속에는 엄함이 깔려있어야 한다.
자녀가 바람직한 품성을 가지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엄부와 자모의 성향을 다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이 경험이 자녀의 성품에 스며들어야 한다. 제일 나쁜 것은 규칙을 적용하고 준수하는 데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의 행동에 대한 판단과 규칙을 적용하는데 갈등을 빚는 것이다. 아버지는 잘못을 했다고 나무라고 합당한 처벌을 하려고 하는데 반해 어머니는 잘못이 없다고 감싸거나 처벌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훈육의 효과는 현저하게 떨어지고, 자녀는 눈치만 늘어난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한 문화에서도 엄부와 자모의 성격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엄부의 성향이 강한 문화를 ‘부성적(父性的)’이라고 한다면, 대조적으로 자모의 성향이 더 우세하면 ‘모성적(母性的)’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부성적 문화에서는 엄격한 법과 그 적용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법을 어겼을 때는 강하게 처벌한다. 대조적으로 모성적 문화에서는 용서, 사랑, 화해 등의 가치가 더 우세하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자신에게 엄해
규칙을 어기는 자체가 양심에 저촉
처벌 받는 경우는 마음 상하는 것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 중의 하나는 부성적 성향과 모성적 성향이 강하게 갈등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지난 12월 19일 한 경기에서 명백한 오심을 한 심판들에게 ‘일벌백계’의 시범을 보인다는 의미에서 ‘무기한 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해당 연맹 관계자는 중징계를 내린 이유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적정한 제재를 위해 고민했다. 연맹 역사상 최고의 징계를 내렸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의 들끓는 여론에 부합하는 부성적 성향이 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지 불과 보름만인 금년 1월 3일 국내의 대표적인 한 언론에서 “생계 끊긴 ‘출장정지’ 심판, ‘실수’ 대가로는 가혹하다”라는 제목 하에 징계가 너무 심하다는 반대 여론이 있다고 보도하였다. 징계가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는 “밥줄이 끊겨 생계마저 막막하다” “오심은 충분히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수이다” “그가 사건 이전까지 과오 없이 공정하게 잘 해온 판관이다. 이만한 능력을 가진 심판도 보기 드물다” 등을 들었다. 이런 주장은 명백히 ‘온정주의(溫情主義)’에 바탕한 모성적 성향의 판단이다.
물론 이 기사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일 수 있다. 그리고 모성적 성향의 판단이 틀린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부성적 판단과 모성적 판단이 너무 가까운 시간에 충돌한다는 것이다. ‘엄부자모’의 경우처럼, 한번 규칙을 정했으면 그 규칙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처벌의 효과, 즉 엄한 아버지의 훈육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의 의미가 엄중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처음부터 모두가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규칙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규칙에 의거해 합당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일단 처벌을 내렸으면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처음부터 ‘무기한 출장정지’과 같은 황당한 징계는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합당한 처벌 수위가 정해지면, 가능한 한 그 결정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자애롭다’는 것은 쉽게 처벌을 풀어준다는 뜻이 아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그 행위 때문에 인간 자체를 비난하거나 ‘낙인’을 찍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회환의 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한 번의 실수로 지나친 마음의 상처와 좌절을 겪지 않도록 보듬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노정용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