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20세기 초에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능은 성이라고 주장한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세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은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프로이트 이후의 20세기가 누구나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대로 변화한 것을 보면 그의 혜안에 감탄할 뿐이다.
어느 한 주제도 더 이상 금기 안돼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는 성과 죽음의 주제와 관련하여 어떤 세기가 될 것인가? 21세기는 아마도 성과 죽음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이제는 어느 한 주제도 더 이상 금기시되지 않는다. 21세기는 지금까지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환경에서 정확한 예측이 거의 불가능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양한 생활패턴이 요구되고 또 허용될 것이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삶의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주제이든 더 이상 금기로 묶어놓을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성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된 만큼 죽음에 대한 담론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계속 음지에 머물고 있다.
이런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 ‘죽음교육’의 부재이다. 최근 죽음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동시에 한 두 대학과 사설 교육기관에서 ‘죽음학’에 대한 교육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 크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죽음교육’은 단순히 잘 죽는 것(well-dying)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참된 의미와 태도를 가르침으로 오히려 삶을 더욱 값지고 보람 있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well-living).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이 결합될 때에만 ‘행복한 삶(well-being)’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고, 노인자살률은 세계 1위이다. 그리고 어느 나라보다 가파르게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1950년대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54세에 불과했던 것이 60여년이 지난 현재 84세로 늘어났다. 이제는 단지 오래 사는 것이 반드시 축복일 수만은 없고, 고령에 대비하지 않으면 오히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이나 사회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아직도 성에 대한 담론 활성화만큼
죽음에 대한 담론 활성화되지 못해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하루 속히 중고등학교를 비롯한 공교육에서 ‘죽음교욱’을 정규 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 일각에서는 어떻게 공교육 기관에서 ‘죽음’에 대한 교육을 할 수 있느냐고 의구심을 표하고 반대를 한다. 이들은 죽음을 부정적 사건으로 인식하고, 당연히 개인적인 사안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처음 공교육 기관에서 ‘성교육’을 실시하려고 할 때에도 유사한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성교육 반대론자들은 ‘성’은 공개적으로 가르칠 수 없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에 의하면, 성은 은밀한 것이고 지극히 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은밀히 깨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성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오히려 더욱 공개적이고 구체적인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몇 십년이 지난 후에는 ‘죽음교육’의 실시 여부에 대한 논쟁은 사라지고, 그 내용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될 것이다.
전생애발달심리학을 주창한 에릭슨(Erik Erikson, 1902-1994)은 노년기에 얻을 수 있는 덕성을 ‘지혜(知慧)’라고 주장했다. 노년이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지혜는 죽음을 앞두고 삶에 대해 가지는 초연한 자세에서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선물이다. 노년기에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는 ‘나이’보다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노인이 되었어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다.
지혜를 얻기 위해 꼭 노년기에 이르도록 기다릴 필요는 없다. 만약 젊었을 때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현재의 즉각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심리적 거리’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젊어서도 얼마든지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젊은이들이 삶을 허비하는 것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죽음을 가깝게 의식하고 살아간다면 하루하루 건강하고 보람 있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교육’은 결국 ‘삶교육’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직면하고 품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죽음은 개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의 문제였다. 엄격한 유교적 의식에 따르면 ‘객사(客死)’는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객사한 시신은 대문 안으로 들어올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병원에서도 더 이상 회생할 가망이 없으면 가족들에게 댁으로 모시고 가라고 권했다. 병원에서 사망하는 것도 객사이기 때문이었다.
'잘 사는 것' '잘 죽는 것' 결합될 때
모두 '행복한 삶' 가능하기 때문
집에서 숨을 거두는 경우, 가족이 둘러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殞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지금도 “부모의 임종(臨終)을 지켰는지”의 여부가 큰 관심사인 이유다. 어린애일지라도 조부모의 임종을 지키고, 시신을 염하는 모습을 지켜보도록 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도록 자연스럽게 교육했다.
요즘에는 반대로 집에서 숨을 거두는 경우에도 장례식을 병원에서 치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물론 요즘의 아파트와 같은 주거공간에서 전통적인 장례식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런 관습이 오히려 죽음을 멀리하고 두렵고 피해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에 직면하고, 충분히 애도하는 것도 성숙에 큰 교육이 된다. 자신의 슬픔을 충분히 느끼는 것이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다. 자신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도 느낄 수 없다.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유언을 남긴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 1926-2004)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사람이다. 그녀는 죽음에 대한 경험적 연구의 문을 연 정신의학자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온몸이 마비되며 죽음에 직면하는 경험을 한 후 70세가 되던 해에 쓴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에서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