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들이 자살한 후 어머니가 쓴 글이다. 이 글에는 자살유가족들이 겪는 고통이 어떤지를 짧지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하상훈, 자살유가족의 슬픔 회복을 위한 우리 사회의 역할. 2019년 생명문화학회, 생명존중시민회의, 생사문화산업연구소 학술세미나집에서 인용)
자살은 당사자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을 줄이기 위해서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과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가 조직적이고 긴밀한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히 국가에서도 자살의 심각성을 깨닫고 보건복지부에 자살예방정책과를 두고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학술단체나 민간단체 그리고 상담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예방을 위한 다방면의 활동을 하고 있다.
작년 1만3670명 스스로 목숨 끊어
자살을 줄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남겨진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이다. 소위 ‘자살유가족’이나 ‘자살생존자’라고 부르는 분들에 대한 배려나 도움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 ‘자살유가족’은 쉽게 정의하면 “한 자살자의 남겨진 가족”이다.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쓰이는 ‘자살생존자’라는 용어에는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 동료 등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왔던 사람들도 포함된다.
자살유가족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 중 하나는 실제적으로 자살유가족은 자살위험이나 우울증은 일반인의 7배로 높고, 자살을 시도하는 횟수는 일반인의 4배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가족이나 친지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는 경우, 힘든 일을 이겨내는 힘이 현저히 줄어든다. 그래서 힘든 일이 생기면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탤런트 최진실과 가수 최진영 남매, 그리고 전 남편 조성민 등의 자살 예를 보면 이해가 된다.
우리 사회와 문화가 높은 자살률에 큰 원인을 제공한다. 우리 문화는 강력한 가족중심주의이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에서 제일 처음 다루는 한글은 ‘나’ ‘너’ ‘우리’이다. 그 다음이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우리는 가족’이다. 그만큼 우리 문화는 가족중심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가족중심주의에서는 ‘가족동일체’ 의식이 강하다. ‘우리는 하나’라는 문화의 특징이 제일 잘 나타나는 곳이 바로 가족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가족원 중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서구에서 자살을 경험하는 것과는 그 의미와 강도가 다르다. 당연히 서구에서도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자살한다는 것은 남겨진 가족에게 큰 충격이다. 하지만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동일체라는 의식이 약하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심리적 경계선은 분명하다. 특히 가족이 성인이 된 후로는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는 가족을 동일체로 보기 때문에 가족이 자살을 하면 상실감과 허탈감이 더 심하다. 왜냐하면 자살한 가족과 ‘우리’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가족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 사람과 내가 합해야 우리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마음을 절절히 표현한 윗글에서도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엄마’하고 달려올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아들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최근 연예인검찰조사관 등 비보
한 해만 8만2020명 유가족 발생
동시에 죄책감을 강하게 느낀다. 위 글에서 “저는 아들이 죽음과도 바꿀 만큼 고통스러워 했는데도 엄마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남편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며 삶의 의욕을 잃은 것 같습니다. 큰 아들도 동생의 고통을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못 잡는 것 같아요.” ‘가족은 하나’인데 그 고통을 미리 알고 위로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후회가 끊임없이 밀려온다. “내가 조금만 더 주의 기울였으면...”, “내가 조금만 더 잘 해주었으면” 등 자살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끊임없이 괴롭힌다.
‘가족동일체’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가족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이웃들로부터 많은 질책을 받을 것이라는 염려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이 자살을 하는 경우 남겨진 가족에 대해 더 많은 비난을 한다. 드러내놓고 비난하지 않는 경우에도 암암리에 자살유가족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무언의 속삼임과 냉대(冷待)에 상처를 입는다. 위 글에서도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 혼자 집에서 울 때가 많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결국은 자신의 삶은 개인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하고, 가족도 도와주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하는 정도가 약하다. 죄책감과 이웃의 비난이 두려워 부정적 감정을 감추다보면 애도를 할 기회를 충분히 가질 수 없다. 자살로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더 할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그리고 죄책감과 상실감, 분노 등의 부정적 감정을 경험한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두거나 억압을 하는 경우에는, 이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혀 일상적인 삶으로 복귀하기가 쉽지 않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상처를 극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내면에서는 풀지 못한 부정적 감정이 계속 회한(悔恨)으로 남게 된다. 이 회한의 감정은 수시로 떠올라 계속 마음을 괴롭힌다. 그래서 심한 경우 우울증에 빠지게도 된다.
국가서도 자살의 심각성 깨달아
유가족 우울증 일반인 7배 높아
이별에 의한 부정적 감정은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면 희석되고 부정적 감정이 사라짐과 동시에 함께 지냈을 때의 기쁨이나 즐거움 등의 긍정적 감정이 우세하게 되면서 점차로 평정심을 찾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쉬운 과정이 아니다. 때때로 격한 애도의 감정이 폭발하기도 한다. 장례식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통곡하면서 비탄의 감정을 쏟아내는 것을 목격했다면 쉽게 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자살유가족들이 마음 놓고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는 여건과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이든지, 죄책감이나 상실감이든지, 또는 울분과 분노의 감정이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감정은 옳고 그름의 대상이 아니다. 긍정적 감정은 좋은 감정이고 부정적 감정은 나쁜 감정이 아니다. 감정은 존재의 밑바닥에서 분출되는 신호일 뿐이다. 그 감정이 표현되고 인정받을 때 비로소 부정적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