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 안상학
구월이던가요
푸른 그늘을 걸어서 들어가는 길 누군가
팔상전 기와 중 유독 푸른빛 기와 하나 있다는데요
그 기와를 찾으면 극락 간다고 하는데요
혼잣말처럼 흘리던 사람은 딴전이고요
정작 뒤에 가던 우매한 중생 하나
그 말을 날름 주워 들고서는
극락에 미련이 있는지 어쩌는지
팔상전 기와를 샅샅이 둘러보는데요
헛, 그, 참,
어디에도 푸른 기와는 없고 해서
우두커니 하늘만 올려다보는데요
문득 팔상전 꼭대기 위로 펼쳐진 궁륭의 하늘
그 푸른 하늘 한 장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 글쎄, 무릎을 치며 환호작약하더라니까요
허긴, 극락이 거기 있다는 소문은
벌써부터 파다한 세상이지만 말이지요
풍광이 빼어난 산속에는 꼭 절집이 보인다
절집은 주로 어디에 있던가. 풍광이 빼어난 산속에 주로 있다. 반드시 산속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강이나 호수가 보인다. 아니면 저수지, 연못이 입구 쪽에 떡하니 가로막고 있음이다. 그렇다. 입지가 호산공수(湖山拱秀·호수와 산이 빼어난 경치를 껴안고 있다) 격이다.
살아오면서 내소사, 선암사, 백양사 단풍은 더러 보았으나 여태껏 속리산 ‘법주사’를 가을엔 가보질 못했다. 그 유명하다는 ‘팔상전(捌相殿)’을 단 한 번도 직접 구경한 적이 없다면 그 누가 믿어주랴.
이미 구월은 지났다. 시월이 다 가기 전에 충북 보은으로 기필코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이 마음 또한 “극락에 미련이 있는지 어쩌는지/ 팔상전 기와를 샅샅이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정말이지 간절해져서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어머니(87세)가 추석 이후 바로 병원 갔더니 “헛, 그, 참” 입을 열게 하는, 더 이상은 오래 살진 못하신다고 가족들은 준비하라고 의사가 그러니 철부지인 난들 속수무책 어쩌랴. 가슴이 온통 퍼렇게 미어진다. 이제 산에 산에는 막 단풍이 곱게 물들 텐데.
어디에도 푸른 기와는 없고 해서
우두커니 하늘만 올려다보는데요
문득 팔상전 꼭대기 위로 펼쳐진 궁륭의 하늘
그 푸른 하늘 한 장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 글쎄, 무릎을 치며 환호작약하더라니까요
궁륭(穹窿). 절집 목조 건물 천장 기와의 활처럼 둥근 틈새로 보이는 “그 푸른 하늘 한 장 걸려 있는 것을 보”러 나도 그곳에 가고 싶다. 아니다. 꼭 이 가을날엔 나부터 갈 것이다. 그런 후에 “아, 글쎄, 무릎을 치며 환호작약”하는 우스꽝스런 내 모습 옆의 누군가 혹 볼지도.
팔상전(捌相殿).
네이버에 접속해 검색해보니 팔상전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온다. 일부를 옮기자면 이렇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폭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 ‘팔(八)’ ‘팔(捌)’은 같은 글자임)를 간직하고 있는 절 안의 건물을 팔상전이라 한다. 그런데 팔상도는 고대의 불교사원에서 탑 안에 주로 봉안되었기 때문에 팔상전은 종종 탑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법주사팔상전은 곧 5층 목탑인 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에서)
나는 절집 마당에 있는 탑을 보면 그 모양이 꼭 한자로 말씀을 뜻하는 ‘언(言)’ 모양을 취하는 것에 신기하고 놀라워 한참을 멍하니 서 있곤 했었다. 사진 속의 법주사 팔성전은 목조 건물인데 유일무이하게도 돌탑이 아닌 나무와 기와로 집처럼 탑이 지어졌다고 그런다.
내 마음을 흔든, 시인 안상학(1962~ )의 ‘법주사’는 그의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걷는사람, 2020년)에 보인다.
시인은 낱말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림을 모르는 자는 시를 모를 것이다.”(연암 박지원)
시인 공광규(1960~ )의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시인동네, 2009년)을 독서하다가 내가 따로 메모해 둔 글이기도 하다. 출처는 조선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라고 한다. 거기에서 시인이 인용한 것이다. 시인의 이야기 강의를 좀 더 살피면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박지원은 “그림을 모르는 자는 시를 모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호라티우스는 <시의 기교>에서 “시는 그림 같다”고 했으며, 호라티우스 이전 선배인 시모니데스는 “시는 말하는 그림이고, 그림은 말 없는 시”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시인은 낱말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말입니다. 그림이 눈으로 포착된 외부세계를 그리기 때문에 그림시 역시 단번에 눈으로 감지되는 장면을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바로 심상(이미지) 시입니다. (같은 책, 550쪽 참조)
‘시인은 낱말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공광규 시인의 시 한 편을 여기에 소개한다. <걸림돌>이 그것이다.
걸림돌 / 공광규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 되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공광규 시인의 <걸림돌>은 계간 <황해문학>(2009년 봄호)에 발표한 시라고 한다. 비슷한 또래의 안상학 시인의 ‘법주사’와 나란히 곁들여 이 시를 오래 씹고 깊이 음미하다가 퍼뜩 떠오른 우리 옛 그림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송하기승(松下棋僧)>이라는 그림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서 보자.
저것은 걸림돌인가, 아니면 디딤돌인가
민머리의 두 스님이 소나무 그늘 아래서 오락을 즐기는 모습니다. 오락(娛樂)은 내가 즐거운 오락(吾樂)이기도 하니 너무 지나치게 되면 극락(極樂)의 세계에 닿는 듯 환상과 착각을 종종 불러일으킨다. 장기 두는 장소는 사찰 경내(境內)는 아닌 듯 하고 밖으로 이어지는 길목 으슥한 곳이지 싶다. 장기판이 땅바닥에 그려져 있다. 장기말을 대신할 수 있는 돌멩이로 대국을 겨루는 폼이 하루 이틀, 한두 번 좀 놀아본 솜씨는 영 아닌 듯하다. 또 스님들 복장을 보니 “구얼이던가요”는 아닌 것 같고 여름철 끝물인 팔월 말쯤이 되어 얼핏 보인다.
고깔을 쓰고 목에 염주를 두른 스님이 소나무 발치에 앉아 중앙에 있으니 훈수를 두는 모양이니 옛 그림에는 스님이 모두 세 명 등장한다.
우리는 옛 그림을 통해서 어느 스님이 거의 이겼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저고리 끈을 풀어헤치고 정강이를 다 드러내면서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화면 오른쪽 스님이 거의 승기(勝氣)를 잡았음이다. 반면에 맞은편 스님은 심각한 얼굴로 반전을 짜내느라 정신을 집중하는 중이다. 다시 고깔 쓴 스님을 보자면 금방이라도 “헛, 그, 참”을 연발하는 눈빛인데 언제부터 그랬던 것일까.
이에 대해 한국 고미술의 ‘신세대 통역자’라 불리는 탁현규 박사의 해설은 이렇다.
고깔을 쓰고 목에 염주를 두른 노스님이 비스듬히 앉아 장기판을 내려다보고 있네요. 발에 짚신도 신고 있는 걸로 보아 외출 나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젊은 스님들이 장기를 두고 있으니 슬쩍 구경 온 모양입니다. ( <삶의 쉼표가 되는, 옛 그림 한 수저>, 139쪽 참조)
어쨌든 그림 속 두 스님들에게 있어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멩이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고 있음이다. 그렇다. 똑 같은 돌이어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는 하는 것이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반전의 드라마이지 싶다.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이 석 줄의 시! 줄 하나를 튕길 때마다 걸림돌이 디딤돌로 변주가 되기도 하고, 여태 즐거웠던 오락의 음악이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처럼 소음(騷音)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들 쯤은 능히 해본 솜씨라고 한다면 그것이 왜 가정사에 걸림돌이 되고, 삶의 활력소로 디딤돌이 되는지 이미 잘 나갔던 중년의 남자라면 모두 익히 경험을 해 보았으리라.
남편의 바람기?
그것도 돈이 있고 건강할 때의 일이다. 돈도 없고 늙었는데 “중소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하는 바람을 어찌 피우겠는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사 관계에 있어서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의 내 아내와 가족, 친구, 이웃이 쓸모없는 돌멩이로 편견에 사로잡힐지라도 어쩌란 말인가.
돌멩이 보기를 황금 같이 볼 것인지, 아니면 황금을 돌멩이 같이 볼 것인지는 순전히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아니 그런가?
동자승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예전에 스승님은 제 머리를 어루만져 주시며 오계(五戒)를 내리고 법명(法名)을 지어주셨습니다. 지금 스승님께서 이름인즉 내가 아니며 나는 ‘공(空)’이라고 하오시니, ‘공’이라는 건 형체가 없는 것이거늘 이름을 얻다 쓰겠습니까? 제 이름을 돌려드리고자 하옵니다.”
대사가 말했다.
“너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순순히 보내어라. 내가 60년 동안 세상을 보니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넘실넘실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나니, 해와 달은 가고 또 가서 잠시도 그 바퀴를 멈추지 않거늘 내일의 해는 오늘의 해가 아니란다. 그러므로 미리 맞이하는 것은(迎)은 거스르는 것(逆)이요, 좇아가 붙잡는 것(挽)은 억지로 힘쓰는 것(勉)이요, 보내는 것(遣)은 순순히 따르는 것(順)이다. 네 마음을 머물러 두지 말며, 네 기운을 막아 두지 말지니, 명(命)을 순순히 따르며 명을 통해 자신을 보아, 이치에 따라 보내고 이치로써 대상을 보라. 그러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물이 흐르고 거기 흰 구름이 피어나리라.”
나는 당시 턱을 괴고 대사의 곁에 앉아 있다가 이 말을 들었는데 참으로 정신이 멍하였다(余時支頤, 旁坐聽之, 固茫然也).
앞의 글은 <연암산문정독>(돌베개, 2007년)에 보인다. 조선 박지원의 ‘관재기(觀齋記)’라는 글의 일부이다.
미리 맞이하는 영(迎)이나 거스르는 역(逆), 좇아가 붙잡는 만(挽)이나 억지로 힘쓰는 면(勉 ), 그리고 보내는 견(遣)과 순순히 따르는 순(順)이란 한자는 길가의 돌멩이처럼 엇비슷해 보인다. 무엇이 걸림돌인지, 디딤돌인지 내 손에 쥐어봐야지 알 수 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묘용(妙用)의 이치이다. 이를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옛 사람은 말했다.
‘법주사’와 ‘걸림돌’이란 시를 통해, 나는 내 어머니의 임종을 마음속으로 고요하게 처음 받아들이기로 맘먹었다. “보내는 것(遣)은 순순히 따르는 것(順)”이 되기 때문이다. 그 전에 내 어머니를 모시고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을 보는, 가을 단풍 여행을 곧 떠날 것이다. 우두커니 파아란 하늘과 붉은 단풍만 잔뜩 보고, 푸른 기와를 찾진 못할지라도….
◆ 참고문헌
안상학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2020.
탁현규 <삶의 쉼표가 되는, 옛 그림 한 수저>, 이와우, 2020.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시인동네, 2009.
이어산 외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시와실천, 2020.
박희병 외 편역 <연암산문정독>, 돌베개, 2007.
송재소 <중국 인문 기행>, 창비, 2017.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