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서늘한 가을바람 이는 때에 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이다. ‘곁’과 ‘옆’이란 낱말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시인은 낱말에 예민해서 ‘곁’은 곧잘 수용하나 ‘옆’은 살짝 튼다. 버리고 흘린다.
한국시인 중에 김사인(金思寅, 1956~ )은 시작(詩作)에서 근사한 ‘옆’을 지우고 ‘곁’을 더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일테면 앞의 시(‘조용한 일’)가 그렇기도 하고, 그가 펴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어린 당나귀 곁에서’라든가 대표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년)에 등장하는 시를 뒤적이면 상당수의 ‘곁’이란 말이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곁’과 ‘옆’의 차이
‘곁’은 ‘사람’을 최우선으로 쓰이는 말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으로 강조할 수 있다. 반면에 ‘옆’은 ‘돈·명예·권력’의 냄새가 오히려 짙어 보인다. 이것이 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으로 사람을 줄 세우고, 이동시킨다.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행하면서 잘 나가는 ‘그’의 옆에 서게 한다. 그것은 항상 ‘그’의 오른쪽이나 왼쪽에 가깝다. 어느 날, ‘그’가 부질없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으로 권력과 영광이 끝나면 아무도 옆엔 없겠지만.
‘곁’은 ‘그’에게 사랑이나 우정 혹은 인정을 기꺼이 ‘주려고 하는 것’에 있다면, ‘옆’은 ‘그’에게 가서 사랑 따위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상당한 차이이고 메울 수 없는 간격이 된다.
‘곁’과 ‘옆’을 모두 아우르는 말로 우리는 ‘측근(側近)’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측’이 ‘가족과 형제, 지기(벗)’로서 공간적·심리적으로 가까운 사이를 가리킨다면 ‘근’은 부와 권력의 물리적인 거리감에 지나지 않고 치우쳐 있는 말이다.
다시 앞의 시로 돌아가 ‘곁’ 자 대신에 ‘옆’이란 글자로 말을 바꾸어 찬찬히 소리 내어 읽어 보자. 전혀 딴판인 느낌을 어쩌면 가지게 될 것이다. 다른 차원의 감정을 소비하게 될 것이다. ‘곁’과 ‘옆’의 커다란 차이를 몸소 만지게 될 것이다.
한 글자의 미묘한 차이와 울림(곁→옆)이 시를 읽고 감상하는 깊고 풍부한 맛에 차이의 변화를 일으킨다. 품격이 올랐다가, 내려가는 교차지점이 된다. 그렇듯 느껴진다.
서녀 명란의 성취 비결
중국 역사 드라마 ‘녹비홍수(綠肥紅瘦)’를 아주 흥미롭게 시청한 적이 있다. 극중 주인공 ‘명란’은 북송(北宋) 관리 성씨 가문의 여섯째로 서녀(庶女)의 신분이다. 셋째 마님(첩)의 딸로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나 매사 우유부단한 아버지의 무관심과 큰 마님, 둘째 마님의 냉대와 이복자매들의 질투를 받고 15세 소녀로 어느덧 성장한다. 혈혈단신이었지만 다행이도 명란의 ‘곁’에는 언제나 성씨 집안의 큰 어른 노마님이 있었다. 노마님이 실은 후원자였다. ‘곁’의 전부였다.
서녀 명란이 성장하는 스토리와 애정, 게다가 녕원후작 가문의 둘째 공자와 결혼에 성공해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성취하는 과정이 참으로 반전이면서 드라마틱하다. 한 마디로 ‘재미지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관심즉란(關心則亂, 1980~)의 장편소설 <서녀명란전>(위즈덤하우스, 2020년)이라고 한다. 중국 인기작가인 관심즉란이 빚은 여주인공 명란의 총명함의 캐릭터는 북송 시대의 유명한 여성 문인 이청조(李淸照, 1084~1155)를 모델로 취했다고 한다.
이청조의 ‘여몽령(如夢令)’에서 ‘지부지부응시녹비홍수(知否知否应是绿肥红瘦)’라는 명구를 따온 드라마의 제목은 퍽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여몽령 전문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昨夜雨疏風驟 (작야우소풍취)
濃睡不消殘酒 (농수불소잔주)
試問捲簾人 (시문권렴인)
却道海棠依舊 (각도해당의구)
知否 知否 (지부 지부)
應是綠肥紅瘦 (응시녹비홍수)
어젯밤 빗소리 잦아들자 바람이 거셌지
취기(殘酒)가 가시지 않아서 잠이 깊어졌네
발(簾) 걷는 시녀에게 물었더니
외려(却) 해당화는 전날(依舊)과 다름이 없다고 하네
(그 시녀가) 알긴 아는 걸까? 알긴 아는 걸까?
응당 붉은 꽃일랑 떨어지고 잎만이 더욱더 짙푸를 터인데
해당화가 피는 날에 찾아오겠다는 임의 약속이 있었을 것이다. 그걸 모를 시녀가 아니다. 밤새 내린 비와 바람으로 해당화는 꽃이 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가씨를 모시는 시녀는 짐짓 능청을 떤다.
“해당화는 그대로라고, 그러니 안심하시라”고 발을 걷으면서 답한 것이다. 그래서 아가씨는 저것이 내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지 알긴 아는구나, 혼잣말을 두어 번 반복한 것이다.
분명히 꽃은 비바람에 다 지고 겨우 잎만이 초라히 남았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서 시녀의 입장은 ‘옆’에 멈추지 않고 ‘곁’으로 심정적으로 좁혀지고 있다.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주는 두 사람의 소통의 방법이 매우 흥미롭다.
이와 같이 “시를 읽는 것은 현실 너머를 보는 것이다. 눈앞의 세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찾는 것이며, 다른 삶과 다른 차원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젊고 늙고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타인과 나누는 것”(류시화)이다.
시와 그림,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거울
좋은 시와 좋은 그림의 힘은 우리들로 하여금 ‘나’를 고요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요컨대 벌거벗은 자화상으로 초대한다. 참모습을 보여주는 매직의 거울이 된다. 하여 앞으로의 내 인생을 볼 수 있도록 잘 인도한다. 이끌어준다.
비록 추워도
둘이서 자는 밤은
든든하여라
일본 바쇼(芭蕉, 1644~1694)의 하이쿠(俳句:일본 전통의 짧은 시) 중 내가 좋아하는 시 한 수이다. 여기서 ‘둘’의 관계는 부부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으며 남남일 수도 있지만 진심이 통하는 ‘곁’이 아니라 ‘옆’을 내준 잠자리라고 한다면 “든든”한 밤은 오지 않는다. 그렇다. ‘곁’은 충심과 진심의 무늬라고 한다면 ‘옆’은 체면치레 무늬로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가 그린 <예>라는 그림에는 행복이 보인다. 숨이 막힌다. 생애 벅찬 희열의 순간이 고스란히 그림에는 여자의 눈빛으로 빛나고 물들고 있어서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예!”라고 남자를 향해서 말함이 금방이라도 곧 들려올 것만 같다.
이에 대해 서양미술사에 밝은 이주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나의 아내가 되어주겠소?” 또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겠소?”라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눈을 반짝이며 “예”하고 대답한 것 같습니다. (중략) 그림을 보니 둘 사이에 긴장된 정적이 흐릅니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동그랗게 치켜 뜬 여자의 눈은 참으로 많은 것을 다짐하듯 묻고 있네요. 모든 관계들의 갈등이 해소되고, 미래를 향한 막연한 불안이 소멸하는 전환점을 결혼으로 본다면, 가족의 출발은 곧 행복의 시작임에 틀림없습니다. (<다, 그림이다>, 164~165쪽 참조)
그동안 ‘옆’에서 망설이면서 서성이었던 남자가 한 여자 ‘곁’으로 다가와서 내 아내가 되어달라고 청혼하는 프러포즈 그림으로 나는 보고 싶다. 남자와 달리, 여자는 얼마나 이 순간이 오기를 수많은 밤을 지새우면서 초조하게 기다렸을까?
“인생은 숨을 쉰 횟수가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평가된다.”
마야 안젤루(1928~2014)의 명언이다. 미국 여류시인인 안젤루는 토니 모리슨, 오프라 윈프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도 유명했다.
‘옆’은 일신이 편하다. 하지만 ‘곁’은 일신이 고생스럽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꺼이 ‘곁’을 내주거나 서고자하는 까닭에는 고진감래(苦盡甘來) 끝에 숨 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이 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살다가 보면 맑은 날도 있지만 흐린 날도 많게 된다. 또한 어쩔 수 없는 커다란 벽 앞에 좌절하는 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속수무책으로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나 자신과 조우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계기는 누군가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어 줘서다.
그렇다. 실은 “고맙다”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닌, 철부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리는 것조차 조용한 일로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서 넉넉하게 타인을 품으면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예”라고 대답하면서.
아주 사소한 것조차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어”주는 나의 ‘그’를 남편으로 아내로 친구로 상사나 부하로 두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나의 측근인 그들을 그동안 나는 어떻게 대접했는가, 이 가을에 떨어지는 수많은 낙엽을 바라보면서 ‘희생’에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다 지나간다. 지나가면 “조용한 일”이 되겠지만 당장은 서운한 일이고 배신의 오늘이 되니 어쩌랴. ‘곁’으로 남을 것인지 ‘옆’으로 멀찍하게 떨어져 거리를 유지할 것인지는 이제부터 ‘나’ 하기에 달렸다.
아무튼 누군가를 나의 ‘곁’으로 둔다는 것은 가족을 건사하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저 숨만 쉰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피와 땀과 눈물이 요구되는 노력하는 진정성에서 관계가 서로 맺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부로 내 아내를 두고서 ‘여편네’로 가볍게 무시할 일이 아니다. 사소한 것에도 고맙다, 표현해야 남편이 아내의 ‘곁’에 머물 수가 있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 참고문헌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손철주·이주은 <다, 그림이다>, 이봄, 2020.
이청조, 이지운 옮김 <이청조사선>, 지만지, 2008.
류시화 <마음챙김의 시>, 수오서재, 2020.
마쓰오 바쇼, 유옥희 옮김 <바쇼의 하이쿠>, 민음사, 1998.
송재소 <중국 인문 기행2>, 창비, 2017.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