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쾅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어떤 길을 밟았건 수많은 ‘등단 문인’이 있다. 시인만 해도 5만 명이 넘는다는 말을 들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발간되는 크고 작은 잡지들이 모두 신인을 배출하고, 여러 문화제의 백일장으로 등단한 문인들이 있으니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고 정확한 통계도 없다.
그러나 현재 시집을 시리즈로 발간하는 네다섯 정도의 메이저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가면 하나 이상의 출판사에서 군말 없이 시집을 내줄 수 있는 시인은 300명 안팎이다.”
내가 존경했던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고 황현산(黃鉉産, 1945~2018) 선생의 해박한 말이다. 말하자면 앞의 글은 2016년 11월 11일의 기록 일부이다. 그러니 나머지가 더 궁금하다면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난다, 2018년) 을 서점에서 만나볼 일이다.
황현산 선생이 말한 300명 중에 상위 10%에 속하는 인물로는 이성복과 더불어 황지우(黃芝雨, 1952~ ) 시인을 시를 사랑하는 독자인 우리는 빼놓기가 몹시 어려울 것이다.
또한 황지우의 수많은 시 중에 대표작으로 도무지 제외할 수 없는 작품 중의 하나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란 명시를 감히 그 누가 그냥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명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황지우의 네 번째 시집 <게 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사, 1990년)에 등장한다. 그의 나이는 서른하고 아홉이었고, 내 나이는 당시에 스물하고도 일곱이었다.
해가 곧 경자에서 신축으로 바뀐다. 벌써 30여년 세월이 흘렀다. 그랬건만 다시 시와 만나면, 깊이와 감동은 울림의 맛이 여전하다. 퇴색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래엔 반드시 고전이 될 만한, 우리 시대의 뛰어난 명시로 내겐 보인다. 특히 이 부분, 가령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필자 강조)라는 구절은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 가슴에 현악기로 다가와 줄을 만든다. 봄빛을 가득 번지게 한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이렇듯 기다림을 노래하게 한다. 노래는 흥얼흥얼 즐겁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그 시간! 한마디로 만남의 약속을 기다림은 햇살처럼 눈부시다. 나와 너를 동시에 빛나도록 아름답게 만든다. 심금까지 들썩이게 부추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황지우의 명시와 잘 어울리는 우리 옛 그림이 있다. 예컨대 조선의 화가 신윤복이 그렸다(傳稱作)고 전해지는 <기다림>이란 시적인 제목을 단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저 그림의 제목을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제로 그냥 바꿔치기 하고 싶었다. 그래도 하등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림 감상에 더없이 좋다, 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세계적인 작가. 스위스 출신의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문학동네, 2018년)에는 이런 글이 보인다. 다음과 같다.
“관람자가 어떤 종류의 예술을 이해하는 능력을 쌓으려면 누군가가 관람자의 경험 중 아주 취약한 부분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중략) 적절한 자극이 있다면 우리는 작품을 창조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우리 자신의 가치관 및 경험이 아주 잠깐이라도 설핏 겹치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같은 책, 50쪽 참조)
그림을 감상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나의 미진한 지식과 취약한 부분에 손을 내밀어줘야 그 만남의 시간이 기다려지면서 점차 즐거워진다. 행복해진다. 그런 차원에서 신윤복의 작품으로 오해한 나의 무지와 약함에 선뜻 손을 내밀어 준 안내자가 있었으니 하나코 갤러리 대표인 이일수 작가(1968~ )가 그러하다. 이일수의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시공아트, 2014년)에는 독자에게 적절한 자극을 주는 좋은 글이 보인다. 다음과 같다.
그림에 한 여인이 있다. 만물이 기운생동하는 따스한 봄날에 그녀만 혼자서 어떤 미동도 없이 담 모퉁이에 붙박혀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저곳에서의 기다림이 꽤 오래되었나 보다 한다. (중략) 버드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다. 어디서나 흔한 버드나무이지만 이 그림에서는 여인의 묘한 분위기를 더욱 복돋는, 안성맞춤의 특별한 나무가 되었다. (중략) 그런데 그림 속 여인의 키가 상당히 크다. 물론 화면 중심에 위치한 탓도 있겠지만, 조선 시대의 여인이라고 보기에는 키가 매우 커서 몸을 똑바로 세운다면 담장의 높이와 비슷할 정도이고 현대인의 신장 기준으로 본다 해도 장신이다. (중략) 시선은 특히 여인의 앞치마에 한동안 머물게 된다. 그녀의 하반신 대부분을 가린 넉넉한 크기의 앞치마는 그림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과 바람을 넉넉하게 다 담아내고 있다. 소박한 하얀빛이 순결해 보이기까지 한다. (중략) 목선을 따라 흐르는 좁은 동정 아래의 깃과 야무지게 맨 짧고 붉은 저고리 고름은 고개를 살며시 돌려 보이지 않는 그녀의 입술인 듯 붉기만 하다. (같은 책, 15~17쪽 참조)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겹치는 부분도 있고 모르거나 취약한 부분, 가령 ‘키가 장신’이라는 점, 또는 ‘야무지게 맨 짧고 붉은 저고리 고름’ 같은 지적은 새로운 자극제가 되었다. 역시 이름은 남자 같지만 실은 여자인 이일수 작가의 여성적인 안목 덕분일 것이다. 그렇지만 버드나무가 불가 세계의 상징물이라는 해석이나 버드나무를 통해 노류장화(路柳墻花)의 기생으로 여인을 제한하는 시각은 여타 기존의 그림 해설자와 같은 연장의 시각이어서 그리 퍽 신선하다고 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뒤로 들고 있는 모자는 이 기다림의 대상이 누구인지 암시하는 송낙(松蘿)이다. 송낙은 불가의 승려가 평상시에 납의(衲衣)와 함께 착용하는 모자다”(같은 책, 20쪽 참조)라는 설명은 미흡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여승이 평상시에 납의와 함께 쓰는 모자가 송라립(松蘿笠)이라고 하는 송낙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림 속 키 큰 아낙의 기다림은 동성애(레즈비언)로 남녀의 건강한 사랑에서 한참 벗어나거나 아니면 불륜을 저지르기 위한 변장술의 편법으로 도구(송낙)가 가진 의미가 확장이 되어서다.
송낙을 뒷짐에 지고 앞치마를 입은 여인이 버드나무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돌연 여승이라니…. 이건 아니다. 차라리 여승인 척 변장한 젊은 남자 스님이라고 한다면 혹 모를까. 그렇기 때문에 <기다림>이란 그림을 두고 혜원 신윤복의 작품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아닌 쪽으로 생각의 결론이 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그림만 놓고 감상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동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인 것은 틀림이 없다.
봄은 여자의 물 같은 사랑,
가을은 남자의 나뭇잎 같은 마음
황지우의 네 번째 시집에 실린「너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특이하게도 ‘착어(着語)’가 붙었다. ‘착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재찬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가 쓴 《시를 잊은 그대에게》(휴머니스트, 2015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착어란 불가에서 공안(公案)에 붙이는 짤막한 평(評)을 가리킨다. 연인을 기다리는 듯한 시를 읽고 난 후, 그것을 화두 삼아 생각을 좀 해 보자는 것이렷다.
착어의 내용은 이렇다. 기다림은 사랑이다. 기다림은 희망이다. 희망 때문에 기다리고, 절망 때문에 또 희망을 기다리며 또 기다린다. 하면서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초조하다. 기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믿음과 의지다. 시인은 기다림이 수동적인 것만이 아님을 확실히 하고 있다. 너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도 너에게 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기다림이라고 시인은 강변하고 있는 게다. (같은 책, 136쪽 참조)
앞의 <기다림>이란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혜원의 진짜 작품인 <이승영기(尼僧迎妓)>를 함께 곁들어서 그림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참고로 ‘이(尼)’는 여승을 뜻하는 비구니(比丘尼)의 ‘니’ 자를 일컫는다. 화제(畵題)의 뜻을 풀자면 ‘여승이 기생을 맞이한다’가 되겠다. 왜? 이러한 제목을 붙였을까.
그림 속 버드나무 아래 여승(?)부터 살피자. 옷차림이 고급지다. 깨끗하고 단아하다. 여성을 노리는 옷차림의 취향이다. 흰 납의에 겹겹이 옷을 받쳐 입었다. 미투리 신발도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잘생긴 얼굴이다. 오뚝한 콧날, 그리고 점차 다가서는 여인들의 하반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여인네 흰 속곳에 고정되어 보인다.
<이승영기>를 <봄나들이>라는 제목으로 바꿔 달아 혜곡 최순우 선생은 역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 2002년)에서 우리들에게 일찍이 쉽게 풀어 소개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수행하는 여인의 차림을 보면 우선 왼팔에 큼직한 보따리를 끼고 미투리를 신었으며 장옷을 쓰지 않은 것으로써 그 신분을 밝히고 있는 셈인데 말하자면 장옷을 입은 여인이 지체가 높은 여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는 주종간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중략) 만약에 방갓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 까까머리가 흉물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르나 그 머리를 혜원은 잘생긴 방갓으로 감춰 주었고 또 능글맞은 시선도 방갓 속에 가려 주어서 모두가 너무 야비한 느낌을 받지 않도록 은근한 표현을 시도했음이 분명하다. 방금 돋아난 듯싶은 수양버들의 연초록 새순 아래 벌어진 이 일장의 그림은 어찌 보면 너울너울 춤추는 한낮의 호접몽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싱싱한 현실 같기도 해서 봄이 허전한 세대들에게는, 봄이 반가운 세대들보다 느끼는 감회가 절실할는지도 모른다. (같은 책, 403~405쪽 참조)
혜곡의 그림 해설은 언제 봐도 정말 달고 기막히다. 어찌 저리 설명이 시적인가. 그림 같은가. 아무튼 혜원의 진품(<이승영기>)이 전칭작인 <기다림> 보다도 앞선 작품이라고 한다. 이 점을 십분 고려하고 감안해서 보자면, <기다림>은 후인이 <이승영기>를 보고 상상력을 발휘해 그린 그림이지 싶다. 스님을 담장으로 가리고 감추는 대신에 장옷을 입지 못한 여인으로 하여금 앞치마를 입게 하고 송낙을 쥐게 함으로써 춘정의 주도권을 돈만 많은 장옷 입은 여인이 아니라 갖은 고생을 하며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는 앞치마 입은 여인네에게 바친 헌정의 그림은 혹여 상상컨대 아니었을까.
곧 봄이 올 것이다. 옛 화가들은 스산한 겨울이 닥치면 화사한 봄을 소재로 추위를 이겨내고자 그림을 그려냈다. 무더운 여름이 오면 반대로 겨울 분위기가 나는 설중매 혹은 설죽을 종이에 붓질하였다.
사랑의 남녀 타이밍은 서로 다르다. 여자가 봄이라면, 남자는 가을이다. 봄을 맞이한 여자의 가슴엔 물길이 튼다. 오행 중에 수(水)가 많아진다. 반대로 가을을 맞이하는 남자들은 심중엔 바짝 메마른 나뭇잎이 붉게 노랗게 탄다. 목(木)의 기운이 생동한다. 서로 시점(始點·時點·視點)이 모두 반대 방향으로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봄바람은 여자가 가지는 고유한 주도권이고, 갈바람은 남자의 매력이 되고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가 여자라고 한다면 봄은 사랑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고,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가 남자라고 한다면 가을은 사랑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라는 그런 얘기이다. 아니 그런가?
따라서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나 신윤복의 전칭작이라는 <그리움>은 여성적인 화자와 그림 속 인물의 주인공이 여성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혜원의 진품 <이승영기>에서 비구니는 여자가 아닌 변장한 남자의 모습일 수 있다. 주인공은 분명 여성인 사회적으로 성공한(?) 장옷을 입은 기생일 것이다.
정채찬 교수의 책을 보면서, 처음 알았다. 황지우의 명시가 단 5분 만에 쓴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시인들은 황지우를 천재 시인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쓴 시간이 5분이지, 고인 샘물이 어찌 5분 만에 차겠는가. 아닐 것이다. 뛰어난 화가는 쓰윽~ 5분 만에도 어쩌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해도 오랜 준비 과정이 필단(筆端)의 끝으로 나오기 까지 오랜 시간을 두고 갈고 닦은 평소 내공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가당치가 않은 일이 된다. 그렇다. 실은 5분 만에 쓴 시라고 해서, 어찌 5년의 기다림을 겪어 보지 않았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 있으랴. 소름 끼지는 명작의 앞면만 보지 말고, 뒷면도 헤아려 볼 일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가 하루 속히 사라져서 그리운 사람들을 맘껏 만날 그 날을, 한 두어 시간을 족히 서서 기다림도 그림처럼 행복한 시간으로 어서 빨리 오길. 봄이 오면 ‘봄’을 맞이하고 싶다. 봄이여 빨리 그대를 보고 싶습니다. “튀므 망크(Tu me manques)."
◆ 참고문헌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황현산 <사소한 부탁>, 난다, 2018.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휴머니스트, 2015.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2002.
이일수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시공아트, 2014.
알랭 드 보통, 김한영 옮김 <영혼의 미술관>, 문학동네, 2018.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