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넣어도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힐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
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
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
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깃들 때문에
시 한 편을 고요히 겨울 방안에서 뒹굴면서 혼자 읽자니, 너무 좋다. 가만히 살고도 싶어지고 혼자서 그냥 울어도 보고픈 내 마음이 보여서 꿈조차 부푼다. 나와는 동갑내기, 이정록(李楨錄, 1964~ ) 시인의 시를 만약에 천양희, 그가 읽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만/ 아무 생각 없는 듯 쓴 누군가의 시 한 편이/ 너무 좋아서 미울 정도라네/ 눈물의 뼈 같은/ 침묵의 뿔 같은”(천양희 <누군가의 시 한 편> 부분) 시라고, 어쩌면 말할지도 혹 모를 일이다.
사람의 몸이 성전인 까닭은
기도의 시간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이 두 줄의 시(‘몸의 서쪽’ 부분)와 만나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두 손을 가슴높이로 합치게 된다. 기도하듯이 시를 간절히 낭송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이 많아져야지 행복한 거라고. 행복은 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살고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가 어쩌면 전부라고. 이렇듯 우리는 기도의 시간을 뒤로 남겨두는 제법 여유가 생길 것이다.
서른에서 마흔에 펼쳐지는 세상과 새장
앞에 소개한 이정록의 시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코미디 한국영화 한 장면이 불쑥, 맥없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왼쪽 가슴께로 시리게 내려왔다. 최성현 감독의 <그것만이 내 세상>(2018년 作)이 그것이다. 이 영화를, 난 우연히 TV가 있는 거실에서 또 봤더랬다. 그것도 정초(2021년)에 말이다.
한때는 WBC 웰터급 동양 챔피언이었던, 영화 속 주인공 조하(이병헌)와 그의 엄마(윤여정)가 아버지의 폭력과 주사를 못 견디어 도망쳐서 재혼해 낳은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둘째 아들 진태(박정민)가 어느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외식를 하면서 고깔모자 모두 쓰고 나란히 찍힌 사진 한 장. 그것은 엄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만이 내 세상이고, 단적으로 내가 가둔 새장을 여는 생애의 마지막 추억이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넘버원(두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전부)을 차지하는 목록일 것이다.
이 영화의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울었다.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서른에서 마흔 사이의 가정. 가정이란 새장(혹은 세상)의 따스함과 사랑, 안정지대를 나 자신은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아마도 난 그랬을 것이다.
왜 사는 걸까. 시인의 말대로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 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는 시간이 더러는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게 살 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우리가 살면서 서른에서 마흔을 지나, 여전히 쉰하고 예순의 나이가 되도록 우는 까닭에는 뭔가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라는 마음이 수시로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게 울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부유한 차이는 분명 있다. 가령 잘 살고 못 사는 것들에 ‘돈’이 부분적으로 위세를 떨치기도 한다. 그렇다. 이를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들도 나와 똑같이 고통받고 있고, 똑같이 행복을 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 관계의 시작이다”라는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이나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라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 오는 행복론의 말씀과 마주치게 되면 구멍 난 마음을 깁는 위안이 되고, 나의 상처가 고스란히 치유가 되기도 한다.
“행복이란 불행의 긴 시간 사이의 잠깐의 틈이다.”(미국 유머작가 돈 마키스)
한 여자의 일생. 영화 속에서 엄마(윤여정)를 생각하면 ‘잠깐의 틈’이라는 표현이 행복이란 시간이 갖는 특징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발맘발맘, 우리들의 인생살이 속도
이정록의 시를 두 번째로 읽을 때이다. 문득 아름다운 낱말 ‘발맘발맘’의 뜻이 몹시 궁금해졌다. 사전을 찾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역시 우리말이다. 우리말로 “한 발씩 또는 한 걸음씩 길이나 거리를 가늠하며 걷는 모양”을 뜻한다, 그런다. 발맘발맘, 이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시어인가. 시집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뜻도 모르고 무시 받으면서 지나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이정록 시인은 ‘산다’는 의미를 찾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식으로 한 발씩 거리를 가늠하며 시어를 옮겨 우리로 하여금 사는 이유가 뭔지 눈으로 아주 천천히 한 발짝을 조심스레 걸으면서 스스로 깨우치게끔 안내하는 것일지도.
우리가 울고 지나온 길을 뒤돌아서 보자면, 섭섭한 것, 서글픈 것, 얄미운 것, 답답한 것, 못마땅한 것, 어이없는 것, 야속한 것들이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 내가 그랬던가, 하는 식으로 우리는 배시시 살면서 울다가 금세 웃기도 하는데 그것들의 정체는 한결같다. 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에서 알고 보면 비롯되는 것이다.
서른에서 마흔 사이를 걷는 모양으로 비유해서 얘기하자면, ‘성큼성큼’이 어울린다고 한다면 쉰(50세)에서 이순(60세)이 지나면서부터는 여리박빙(如履薄氷)을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 ‘발맘발맘’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차분히 한 걸음씩 떼면서 앞을 향해 걸어야 할 것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이정록 시인에게서 내가 취하고 배우고자함은 바로 그것이다.
명화(名畵)는 언제나 한 편의 시와 같이 보인다
나의 초등학교 친구 중에 ‘김영숙’이 있다. 그 친구 별명이 ‘스마일’이었다. 어릴 적에 그 친구는 항상 웃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서점 미술 코너에서 ‘김영숙’이란 이름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책의 앞날개에 등장하는 김영숙 프로필을 읽다가, 내 친구가 아닌 것을 알고는 허탈하게 웃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964년 생, 김영숙’이라는 점은 분명해서 도서 구입에 난 주저함이 전혀 없었다. 아무튼 수원 출신이 아닌, 대구 출신의 김영숙 작가의 <루브르와 오르세 명화 산책>(마로니에북스, 2007년)이란 책은 내가 언젠가 프랑스 여행을 하게 되면, 참고해야지 하는 그 목적 하나만으로도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드는 좋은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친구가 실은 아니지만, 이름 때문에 친구처럼 느껴진 김영숙의 책을 탐독하다가 한 그림에 나는 오랫동안 꽂힌 적이 있다. 고갱의 그림, <타이티 여인들>이 그것이다. 고갱이란 인물에 대해 김영숙은 이렇게 책에 소개한다. 다음과 같다.
지나치게 열정이 앞섰던 고흐와 냉정하고 야심만만한 사나이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기름과 물처럼 섞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대담한 원색의 사용이나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한순간에 거부할 수 있었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뒤늦은 나이에 거의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은꼴이다. 고갱은 고흐보다 다섯 살 연상으로, 고흐의 입장에서는 배울 것이 너무 많은 존경하는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중략) 고갱은 인상주의나 신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빌려온 짧은 붓터치로 자신이 심경을 묘사한 고흐와는 달리, 비교적 짙은 윤곽선을 한 커다란 색면에 넓게 색을 칠했다. (중략) 그는 넓게 색을 칠하면서, 세잔이나 쇠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색의 성질을 이용해 은근히 양감을 표현하는 일도 포기해버렸다. 따라서 세잔이나 쇠라의 그림보다는 더 평면적인 그림이 되어버렸다. (중략) 고흐가 화가 자신의 고뇌와 번민, 열정을 표현했다면 고갱은 자신이 상상하고 꿈꾸는 세계를 작품 속에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김영숙, <루브르와 오르세 명화 산책>, 296~297쪽 참조)
고갱의 <타이티 여인들>이란 그림은 김영숙의 책을 통해서 난 처음 알았다. 신기했다. 그림을 처음 대면하는 그 아주 짤막한 시간, 나는 이정록 시인의 시를 그림 속 정면을 마주보는 여인의 눈빛을 통해서 다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이렇듯 좋은 그림, 명화(名畵)는 언제나 한 편의 시를 동시에 생각나게 하며, 같이 놓고 대조하면서 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타이티 섬에 사는 원주민으로 보이는 여인이 그림 속에서 둘이 등장한다. 화면의 오른쪽을 차지하는 여인이 좀 더 나이가 있어 보이고, 옆모습만 보이는 왼쪽의 여인은 좀 더 나이가 어리고 젊은 것으로 보아지기에 두 사람은 서로 모녀(母女)의 관계이지 싶다.
왼쪽 여인을 보자. 그녀는 아름답다. 미모가 절정으로 치닫는 방년(芳年)의 꽃다운 처녀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머리숱도 많고 꽃무늬 장식의 치마와 흰 색 나시 상의를 거의 덮어버리는 칠흑 같은 생머리 뒤로 리본 모양의 노란 빛깔의 헤어밴드로 머리를 묶었다. 휴식을 취하는 듯 눈을 감고 있으며 오른 손으로는 바닥을 짚고 있다. 왼발은 앞으로 길게 뻗고. 전체적으로 일(노동)과 상관이 없는 듯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오른 쪽 여인을 보면 눈빛부터 예사롭지 않다. 어딘가 처연해 보이기도 하고 종려나무 잎으로 모자를 짜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있는 손가락과 딴판으로 관람자(화가)를 향하여 곧 불평함을 드러내면서 엉엉 울 것만 같다. 한마디로 그녀는 왼쪽 소녀와 달리 지치고 퍽 고단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오른 편의 여인의 실루엣에서 풍기는 태도는 결연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그렇다. 그냥 두 줄로 시가 읽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이렇듯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 눈빛이 내게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엄마, 윤여정 배우가 잠깐 틈을 내어 보여준 눈빛과 겹치면서 서로 닮아 있다. 엄마이기에, 가능해지는 눈빛, 부모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눈빛이다. 나이 든 여인의 그 눈빛이 자꾸 나를 건들렸다.
시인 최영미는 서양미술 감상을 인도하는 <화가의 우연한 시선>(은행나무, 2013년)에서 ‘작가의 말’로 나의 급소를 정곡으로 깊이 찌른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미술은 우리네 삶의 정직한 거울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여기에 ‘사는 만큼(살아온 만큼) 보인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술 작품의 감상은 무엇보다도 감수성의 문제이며,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는 결코 진정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듯이,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일지라도 우리를 건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연과학이나 철학의 명제와는 다른 그림과 조각의 영역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술도 결국 우리처럼 불완전하며 모순투성이의 인간이 만든 것이니까요. 스치는 눈빛과 몸짓 속에 감춰진 마음을 읽고, 보이지 않는 인간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선과 색채도 넘지 못할 벽이 아닐 겁니다. (최영미 <화가의 우연한 시선>, ‘작가의 말’ 중에서)
어떤 그림은 내 마음을 내어준 것 같이 보이고, 또 어떤 시는 내 시선이 머문 것 같이 고맙게 교차한다. 감동하여 스며듦이 묘하게 겹친다. 이정록의 시에서, 나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이 자꾸만 보였고, 고갱의 그림에서, 나는 못 나고 감춰진 내 마음을 바깥으로 이끄는 그 눈빛이 만나졌다. 행복이란, 별 게 아니다. 사는 것이고 우는 것인데, 눈에 밟히는 것들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에 더러는 시선이 멈추는 것들에 있긴 하다.
“슬프고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시”(신경림, 추천사 중에서)와 그림을 많이 만날수록 더 살아야겠다, 라는 욕심이 내겐 생긴다. 인생독법(人生讀法)은 한 편의 시와 그림에도 있다. 인생살이 시작은 자고로 울음부터이고 산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만고불변(萬古不變)!
◆ 참고문헌
이정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 2016.
김영숙 <루브르와 오르세 명화 산책>, 마로니에북스, 2007.
천양희 <새벽에 생각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최영미 <화가의 우연한 시선>, 은행나무, 2013.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