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벼락거지'는 자신의 소득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음에도 부동산과 주식 등의 자산 가격이 급격히 올라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부르는 신조어다. 실제로 거지라기보다는 순진하고 성실하게 월급만 모으고 재테크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거지로 전락하고, 나만 뒤처진 것 같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 현상을 자조적으로 비유하는 말이다.
벼락부자 아닌 '벼락거지' 신조어 탄생
하지만 자아실현의 단계는 '존재의 욕구'로써 한번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다시 낮은 단계로 퇴행하지 않는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과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ēs)와의 일화가 이 현상을 잘 설명해준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욕심 없는 삶'을 추구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평생 한 벌의 옷만 입고 커다란 나무 항아리 속에서 '개처럼' 살았다. 디오게네스를 존경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그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라고 묻자, 그는 "햇볕을 가리지 않게 옆으로 비켜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일단 자아실현의 단계에 들어가면 아래 단계의 욕구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은 주로 개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이다. 하지만 이 이론은 집단의 행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특정한 집단도 하나의 단위로써 대부분의 집단원이 이런 단계를 공통으로 거치면서 자신들의 욕구를 실현하려고 노력한다고 볼 수 있다. 짧은 시간 안에 세계가 놀랄 만한 정치적·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우리나라가 좋은 예이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한 때 많이 회자되던 '자기실현'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상생활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벼락거지'라는 말이 대체되었고, 이제는 폭주하는 부동산 값에 '내집 마련'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절대절명의 가치가 되었다. '영끌'을 해서라도 내 집을 마련해야만 한다. 머뭇머뭇하다가 실기(失機)를 하는 경우에는 '벼락거지'가 된 것과 같은 자조적인 기분이 든다. 자신을 벼락거지라고 생각하며 정말 '거지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기력해지고, 불만, 분노, 짜증과 같은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며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나가가려는 '근로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에 '영혼'을 빼앗기게 된다.
'벼락거지'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는 '자기실현'의 문턱에서 애쓰다 갑자기 '생존'과 '안전'의 단계로 급하게 추락했다. 덩달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격이 갑작스럽게 '거지'로 변했다. 이런 국격(國格)의 갑작스러운 퇴행이 단순히 코로나19의 탓뿐 만은 아닐 것이다. 반만년동안 강대국에 둘러쌓여 신고(辛苦)의 세월을 이겨낸 우리에게 '내 집'은 단순히 주거공간이 아니라 기본적인 '안전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최소한의 심리적 터전이다. 객관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느낌이 더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우울한 현실에서 영화 '미나리'가 미국에서 큰 호평을 받는다는 사실은 큰 위안을 준다. 74세의 노배우 윤여정님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가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경사(慶事)다. 작년에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은 데 이은 쾌거이다. 특히 이 영화의 정이삭 감독 자신이 '미나리'처럼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해가는 자전적 내용이라 더욱 감동을 준다.
나만 뒤처진 것 같다는 상대적 박탈감 강해져
정 감독은 1978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태어났다. 농장 경영이 꿈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아칸소주 링컨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미나리'의 소년 데이빗(앨런 김)이 정 감독의 어린 시절을 반영한다. 정 감독은 졸업생 중 10~15% 정도가 대학 진학을 하던 시골 고등학교를 마치고 예일대에 입학했다. 생태학을 전공하며 의대 진학을 꿈꿨다. 4학년 때 아시아 영화에 빠지면서 인생 항로를 바꿨다. 유타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아내와 자원봉사로 일했던 르완다 난민 캠프의 참담한 현실을 카메라에 담은 '문유랑가보'를 2007년 선보이며 감독이 됐다. 제작비가 3만달러에 불과한 '문유랑가보'가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정 감독의 아버지는 아들이 감독이 되자 매번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언젠가 '벤허'를 만들겠구나."
정 감독은 '문유랑가보' 이후 네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다.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무책임하게 영화 만들기라는 꿈만 좇고 있다는 생각이 수년 동안 들었다"는 그는 2018년 초 한때 연출을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다. "마흔에 이르러 좀 더 책임감 있게 살고, 가족을 돌보기 시작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때마침 인천 유타대 아시아 캠퍼스에서 교수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올해 8세가 된 딸에게 한국을 더 많이 보여주기 위해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으로 향하기 전 이야기 하나가 마음속에서 움텄다. "영화 한 편을 만들 기회가 한 번은 남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나리'의 시작이었다.
만약 정 감독이 밝힌 대로 예일대 출신 의사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택한, 영화를 통한 '자기실현'의 꿈을 현실적인 욕구 때문에 포기했다면 오늘의 '미나리'와 정이삭 감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생존'과 '안전'으로 급격히 퇴행한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정이삭 감독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내 집 하나 장만하려는 행렬'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향해 '자기실현'이 중요하다는 허망한 충고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다 디오게네스가 될 수 없다.
국격(國格)의 급작스런 추락은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애꿎은 코로나19 탓만 하고 있어도 될까?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