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필자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중년·노년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필자로서는 윤여정 님의 나이 74세에 더 많은 갈채를 보낸다. 우리 사회는 현재 전통적인 '장로제(長老制, gerontocracy)' 사회에서 빠르게 '업적제(業績制, meritocracy)' 사회로 이동하고 있다. '장로제'는 고령자 중심의 지배체제, 즉 노년층이 사회 전반을 장악해 기득권을 유지하는 제제이다. 기득권이 노령화되어 사회가 보수화되고 성장성과 역동성이 떨어지며 청년층의 발언권이 위축된다. 이는 결국 세대 갈등을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사회 보수화로 역동성 성장세 떨어져
'업적제'는 연령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나 실적이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되어 지위나 보수 등이 결정되는 체제이다. 이 체제에서는 나이나 신분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젊은이라도 능력이 있거나 노력을 많이 하면 높은 보상(報償)을 받을 수 있다. 어느 체제에서나 득을 보는 계층이나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갈등이 존재한다. 특히 체제가 급속히 변화하는 과정에서는 집단 간에 대립이 심해지고 갈등이 첨예화한다.
'장로제' 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지금의 연장자들은 '업적제'에서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젊었을 때는 "나이가 들면 나도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윗사람들의 지시대로 살아온 세대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나이가 들면 어린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윗세대가 되어가면서 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존경을 받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두려움과 억울함을 느끼는 세대가 되었다.
반면에, 젊은이들은 더 이상 나이나 신분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스펙'을 쌓는 데 공을 들이고,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명령하거나 불필요한 조언을 남발하는 어른들을 '꼰대'라고 매도한다.
이런 현실에서 나이가 아니라 업적으로 인정받는 윤여정 님과 같은 분은 '100세'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층에게 큰 위안과 앞으로 살아갈 방식에 대한 교훈을 준다. 예전에 '노익장(老益壯)'이란 말이 회자되었다. 늙을 '老' 더할 '益' 씩씩할 '壯'이 합쳐진 말이니 '나이가 들수록 기력이 좋아진다'는 뜻이다. 물론 실제로 기력이 좋아진다기보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활기차게 활동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즉, 윤여정님이 '노익장'을 과시했다. 사실상 연예계와 예술계에서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분들이 많다. '명품배우'로 불리며 존경받는 박정자 님은 1962년 대학 재학시절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이래 한 해도 빠짐없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우리 나이로 올해 팔순인 그가 극 중 팔순 노인의 역을 맡게 된 것은 사실 예삿일이 아니다. 연극 <해롤드와 모드>는 그가 62세였던 18년 전 시작한 대표작으로, 극 중 나이인 80세가 될 때까지 출연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무대라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요즘 노익장을 과시하는 또 다른 연기자는 박인환 님이다. 그는 최근 종영된 TV 미니시리즈에서 말단직 공무원에서 은퇴하고 나이 일흔에 평생 꿈이었던 발레를 시작하는 주인공 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그는 "몸에 딱 달라붙는 발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내 나이가 되면 몸이 굳는다. 나 역시 새롭게 도전하는 만큼 인물에 좀 더 몰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노년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 중의 하나는 노년이 되면 창의력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창의력은 '참신하고 색다른 방법으로 사고하고, 독특한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대부분의 노년에게서 창의성이 감소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년에 창의력이 감소하는 이유는 질병, 개인적 문제, 스트레스 창의적 노력에 대한 관심이나 동기 결여 등과 같은 요인과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면 노년이라고 창의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70대나 80대, 심지어는 90대에도 역사상 위대한 작품을 남긴 예술가들이 많다.
시성(詩聖)으로 추앙받는 괴테(J. W. Goethe)는 대표작 『파우스트』를 24세에 구상하기 시작하여 83세에 사망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하였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무려 60년이나 걸렸다. 또한 시스티나성당(Cappella Sistina) 천장화인 <천지창조>와 벽화인 <최후의 심판>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미켈란젤로(B. Michelangelo)는 1564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도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제작하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항상 병치레를 하면서 작업에 몰두한 그는 말년에는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하기 위해 비를 맞으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달려가다 하인의 등에 업혀 오기를 여러 차례 하기도 했다.
결국 세대갈등 심화 부작용 낳을 뿐
업적제는 능력과 실적이 보수 등 결정
창의력 연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토런스(E. Torrance)에 의하면, 창의적인 사람은 용기가 있으며, 독립심이 강하고 정직하고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이 많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이 있다. 그러니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으면 노년에도 계속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물론 우리 모두 괴테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불후의 명작을 창조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잃어버렸던 자신의 꿈을 찾아 새롭게 도전해보는 용기와 모험심, 그리고 호기심과 열정만 있으면 우리 모두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
영화배우 문소리의 어머니 이향란 님은 69세인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이 황금기"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지금까지 밥만 하다가 왔다"며 평생을 가족을 위한 '밥'을 마련하는 것으로 살아온 그는 2년 전 시니어 모델을 양성하는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한 걸 계기로 배우라는 꿈이 생겼다. 그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어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속에서 불덩이가 왔다 갔다 하고, 죽을 것 같이 힘든 일도 이제는 웬만하면 이해가 되고, 그럴 수 있다 싶고, 또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라는 걸 터득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넉넉해지니 나이 드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이와 관계없이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절실하고 간절함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박인환 님은 맡은 배역을 잘 연기하기 위해 76세의 나이에 "6개월 이상 발레 레슨을 받았다. 처음 기본자세를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소 발레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관련 영상, 서적 등을 많이 찾아보며 발레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윤여정 님도 "'오늘 못 하면 내일 잘린다'는 절박함으로 몰입했다"고 회상했다. 90여 편의 드라마와 33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 계단씩 올랐다. "배고플 때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깨달음은 그렇게 얻은 것이다.
절박함과 치열함으로 경지에 오르고도 내려다보며 대접받으려 하지 않는 노배우들에게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진정한 권위(權威)는 나이나 지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권위는 능력에서 나온다. 연장자들이 구태여 젊은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이해하는 척 할 필요도 없다. 다만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노력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이것이 '남녀노소(男女老少)'가 어울려 살아가는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