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지혜로워진다고 믿는다. 사실 이러한 믿음은 많은 문화권에서 객관적인 증거 없이도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어렸을 때 읽은 <나뭇꾼과 도끼>에 나오는 산신령도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의 모습이고, 도끼자루가 썩는 줄 모르고 바둑에 빠진 신선도 노인이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속에 지혜자는 나이가 많은 것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노인수 많아지고 노년기 길어지면서 최근 지혜 연구 활발
노년기의 지혜에 대한 연구는 전생애 발달을 연구한 에릭슨(E. Erikson)이 불을 지폈다. 성격은 어렸을 때 형성되고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변하지 않는다는 스승 프로이트(S. Freud)와는 다르게 성격은 노년기까지 전생애(全生涯)에 걸쳐 변한다는 이론을 주창했다. 그에 의하면, 각 단계는 자아의 발달 과제를 가지고 있는데, 노년기는 자아통합 대 절망감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자아통합은 "자신의 삶을 그랬어야만 했던 것 그리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그렇다. 나는 실수를 했다. 그러나 그 당시 그 실수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내 삶의 행복했던 일과 함께 받아들이겠다"는 느낌이다. 자아통합을 잘 이루면 지혜(知慧)라는 좋은 덕성을 갖추게 된다. 에릭슨은 지혜를 "죽음을 앞두고 삶에 대해 거리를 둔 객관적 관심"이다.
대조적으로 자아통합을 이루지 못한 노년들은 절망감에 빠진다. 절망감은 "이미 살아온 삶이 후회스럽고, 이제는 시간이 다 흘러버려서 또 다른 삶을 선택할 기회가 없다는 느낌이다." 이 절망감을 잊기 위해 자신이 잘 살았다는 것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현자연(賢者然)'한다. 즉,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한다.
에릭슨의 이론에 비추어보면, 노년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지혜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노년 중에서도 자아통합이 이루어진 사람들만이 지혜를 갖는다. 오히려 절망감에 빠진 노년들은 현자연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참지 못하고 혐오심을 느낀다. 하지만 실상은 이들은 주위 사람들이 아니라 잘 못 살아온 자신에 대한 경멸을 의미한다.
지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한 미첨(Jack Meacham)의 실증적 연구는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밝혀준다. 그의 연구 결과는 젊은이와 노인 중 누가 더 지혜로운지에 대한 상식과 편견에 제동을 걸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놀랍게도 젊은이들이 노인들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노인들은 너무 많이 알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너무 확신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의 습득과 지식의 본질적 오류를 인식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본질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항상 더 정확한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지혜는 모순과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타협과 조화를 이루는 마음을 가질 때 나오는 것인데, 노인들 중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판단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 마음속 깊이 절망감을 느끼는 노년들이 현자연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지혜가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謙遜)이 지혜의 중요한 요소이다.
자아통합 미달성시 노년 절망감에 빠져…완벽하지 못한점 인정이 겸손의 지혜
지혜로운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반드시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르게 사용할 뿐이다. 즉,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실제 상황에 잘 적용할 줄 안다. 때에 따라서는 경험은 오히려 지혜에 큰 위험이 되기도 하는데, 특히 경험이 성공 또는 권력으로 이어질 때 더욱 그러하다. 역설적이게도, 지혜는 오히려 적게 알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확신이 적을 때 발생한다. 우리가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그것이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고, 기존에 가지고 있는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에서 지혜가 창출된다.
결론적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유무는 단순하게 연령과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지혜를 얻어 현자(賢者)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자연(賢者然)할 뿐이다. 현자연한다는 것은 자신이 진정한 현자가 아니면서 현자인 체 한다는 것이다. 에릭슨에 따르면 노년이 되어서 자아통합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기객관화와 죽음을 의식하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객관화와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면 연령에 관계없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노년기에는 이 두 요인이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기일 뿐이다.
지혜를 가지기 위해 노년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젊은이들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령을 불문하고 자기객관화와 죽음을 느끼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종교에서 '종말론(終末論)'을 교리로 삼는 것도 종말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 온다는 것을 느끼며 오늘을 겸손하고 슬기롭게 보내라는 의미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데,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객관화가 중요하다. 자기객관화는 '자신을 남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객관(客觀)의 반대는 주관(主觀)이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자기주관화'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즉,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객관화를 많이 하면 할수록 편견과 오만에서 벗어나 자신과 세상을 정확히 지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이제는 나이와 지혜와의 관계에 대해 불필요한 논쟁에서 벗어나서 연령에 관계없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을 가르치는 데 있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