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의 원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풍속화이다. 옛날 서당에서 공부할 때 악동(惡童)이 다른 친구들의 공부를 방해하면 훈장이 종아리를 걷게 하고 회초리로 때리는 내용이었다. 사실 필자가 학교에 다닌 시절에는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학교에서도 교육의 수단으로 체벌(體罰)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교직에 몸담는 것을 '교편(敎鞭)을 잡는다'라고 표현했다. 즉 교사가 되는 것은 '채찍 편(鞭)을 사용하여 가르치는(敎) 것'으로 인식했다. 오죽하면 2006년 교육부가 교사들의 체벌을 금지하는 내용을 법제화하려고 할 때 현직 교사들이 "그렇다면 어떻게 교육을 하라는 말이냐?"고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즉 때리지 않으면 교육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과에에는 가정과 학교에서 체벌 일상화
자녀나 학생에 대한 체벌은 효율적인 교육의 도구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그동안 허용됐다. 9세 남아를 여행용 가방 안에 가둔 것도 모자라 위로 올라가 뛰기까지 하며 결국 숨지게 한 계모는 범행을 시인하면서도 "거짓말한 데 대한 훈육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8세와 9세의 어린 아들을 옷을 벗긴 채 나체로 산속에 내버려 뒀다가 시민 신고로 경찰에 붙잡힌 엄마 역시 "훈육을 위해 그랬다"고 말했다.
체벌에 대한 논의를 더 하기에 앞서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육'은 '가르칠 교(敎)'와 '기를 육(育)'으로 되어 있다. 즉 교육은 사전에는 '지식이나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주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지식이나 기술 등은 가르치는 내용이고, 인격은 길러주는 내용이다. 교육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가 핵심이다. 그렇다면 교육은 크게 세 가지 중요한 것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누가' 가르치는지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를 주체로 교육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교육관의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의 주체는 교사 또는 부모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교육의 책임을 지고 피교육자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누구에게'의 문제이다. 즉 교육의 객체는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첫째 요소가 결정되면 이 문제는 저절로 답이 나온다. 부모나 교사가 주체가 되면 당연히 배우는 자 즉 자녀나 학생이 교육의 대상인 객체가 된다. 부모나 교사는 자녀나 학생과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다. 자녀나 학생은 보호를 받아야 할 미성숙한 대상이다. 그리고 부모나 교사는 미성숙한 대상을 교육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이끌어 줄 의무를 가지게 된다. 이 의무는 법률적인 강제라기보다 도덕적 의무로 간주되었다. '내리사랑'이 존재하는 이 관계는 인간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도덕이다.
셋째 무엇을 가르칠지 교육의 내용을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나 교사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학생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지는 전적으로 교사나 교육당국에 의해 결정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개개 교사들조차도 교육내용의 선정에서 배제된다. 한 조직의 목적에 따른 교과내용이 정해지면 교사는 효과적으로 학생들을 교육한 대리인으로만 기능하도록 훈련된다. 그리고 그 훈련의 결과를 교단에 설 수 있는 독점적 자격증이 주어진다.
이 교육 체계에서는 자녀와 학생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완전히 피동적인 존재로 가르쳐주는 것을 성실히 배울 의무만 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조선시대의 대표적 초등교육 기관인 서당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서당에서는 주로 유학에 바탕을 둔 한문 교육이 이루어졌다. 공부 내용은 주로 천자문을 통해 한자의 음과 뜻을 익인 후에 명심보감 등을 통해 짧은 문장을 외우고 교훈적인 내용을 익히는 것이었다. 서당의 교육 방법은 주로 책 읽고 외우기, 질의응답 등이다. 학생들은 글자와 뜻을 깨우칠 때까지 읽고 외우기를 반복했고, 배우는 단계에서는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았다. 여기서 가르치는 주체는 훈장이고 객체는 아동들이었다. 물론 아동에게는 주체적으로 무엇을 배울지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완전히 피동적인 객체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교육은 지식 가르치며 인격 수양의 의미
왜 자녀나 학생은 교육 체계에서 배제되어 있을까? 그 이유는 '내리사랑'의 본질에 있다. 내리사랑은 말 그대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교육 관계에서 윗사람은 부모나 교사이고 아랫사람은 당연히 자녀나 학생이다. 그리고 내리사랑은 수직적 관계이다. 내리사랑의 대상은 부족하고 미숙하고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내리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부족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는 미숙한 존재가 어떻게 자신이 무엇을 배울 것인지 그 내용을 선택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교육에서 체벌이 필요한지의 여부는 결국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해야 해결할 수 있다. 교육은 과연 무엇일까? 미숙한 존재를 가르치고 키워서 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것인가? 과연 인간은 스스로 성숙할 능력이 없는 존재인가? 다시 말하면 교육의 핵심은 인간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교육에 해당하는 영어는 'education'이다. 이 단어의 원뜻은 'bring out'이다. 이 의미는 '내놓다, 나타내다'이다. 즉 서양에서는 교육의 본질을 자녀나 학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게 하거나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교육의 핵심은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잠재력은 각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천부(天賦)의 재능이다. 서양에서는 각 사람은 내놓고 나타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반면에 전통적인 우리 교육은 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못하는 존재로 가정하고 교육을 한다. 교육과 함께 자주 쓰이는 '발달하다'라는 말은 영어로 'develop'이다. 이 말의 원뜻은 '감싼 것을 푼다'는 것이다. 역시 원래 가지고 있지만 아직 가려져 있는 것을 풀어서 드러나는 것이 발달이라는 뜻이다.
체벌의 문제는 인간 존재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맞닿아 있다. 서양의 교육철학을 현장에서 제일 잘 구현한 교육방법을 개발했다고 칭송받는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는 부모와 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어린이의 감춰진 힘을 알아내어 칭찬하고 그 힘의 성장을 돕고 보조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겸손히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린이의 진정한 품성이 내면의 힘을 가지고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다."
한 때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현 야당의 대통령 후보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는 합성사진을 유포하면서 "올바른 길로 이끌려는 부모의 마음에서 든 회초리"라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슬픈 코미디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우리나라도 세계에서 62번째로 부모의 체벌도 법으로 금하는 나라가 됐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