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손자의 언어발달에 큰 관심이 간다. 두 살 반이 되니 이제는 제법 말을 잘해서 자신의 의사를 곧잘 표현한다. 그런데 최근에 재미있었던 표현은 "하부지(할아버지) 니가 할래?"이었다.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손자는 아직 존댓말과 반말을 모르기 때문에 할아버지에게 '니가' 라고 이야기하면 큰 실례라는 것을 모른다. 이제 점점 커가면서 존댓말과 반말을 익혀갈 것이다. 이제는 필자보고 아무도 '너'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97세의 노모조차도 필자보고 '너'라고 하지 않는데, 세 살도 안 된 손자에게 '너'라는 호칭을 들을 줄이야!
과거에는 남존여비 부창부수 등 남편과 부인의 관계는 '수직적'
외국인 제자들이 한국말 중에서 제일 배우기 어려운 것이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라고 한다. 존댓말과 반말을 상대에 따라 또 장소에 따라 실수 없이 사용하게 되면 한국어는 거의 다 배운 것이라고 농담조로 이야기하곤 한다. 최근에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존댓말과 반말의 존재 자체가 한국이 아직도 지나치게 수직적 사회라는 뜻이라며, 점차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많이 사라져가고 있다.
과거에는 남존여비(男尊女卑), 부창부수(夫唱婦隨) 등 남편과 부인의 관계를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 관계로 보았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부인이 남편을 소개하면서 "우리 주인"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화에서는 남편은 주인이기 때문에 부인이 남편보다 나이가 많아도 당연히 존댓말을 했다. 반대로 남자는 물론 손위 부인에게 반말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부인이 나이가 많다고 남편에게 반말하는 것은 남편을 무시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최근에 한 대통령 후보의 부인이 사석에서 남편에게 반말한다는 것이 장안에 화제가 됐다. 왜 이런 주제가 화제가 되는지도 의아하지만, 그 해석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 남편에게 사석에서 반말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실권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사석이 아니라 공석에서 남편에게 반말했다면 걱정스러울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도 남편의 권력을 누릴 것이 염려스러운 것보다 예의범절이 없는 사람이 권력자의 부인이 될 것이 염려스러울 수는 있다. 아마 이것을 화제로 삼은 사람의 의도도 그만큼 부인이 남편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반말한다는 것이 꼭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부부간의 존댓말에는 상호평등의 관계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 심리적 거리가 소원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젊은 남녀가 처음 만나 사귀어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서로 존댓말을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서로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반말하기 시작한다. 이 때 상대가 반말하는 것을 무시한다고 오해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야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느낄 것이다.
어느 가정에서나 남편과 부인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공개적으로는 앞에 나서지 않고 다소곳이 행동한다고 해도 실제로 두 사람만이 있을 때의 관계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도 있듯이, 내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부부간의 역동은 정확히 알기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부부일심동체'를 강조해왔기 때문에 부부를 서로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고 각자의 영역을 구분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직은 많이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은 자동적으로 남편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된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필자가 군대생활을 할 때 회자되던 말이 있었다. "남편이 연대장이면 부인도 연대장이고, 남편이 대대장이면 부인도 대대장이다." 하물며 남편이 대통령이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부인이 나이 많다고 남편에 반말…남편 무시하는 의미로 받아들여
우리보다 더 개인중심적 문화를 가진 미국에서조차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을 분리하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2020년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영부인이 되더라도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겠다고 천명했을 때 보수진영에서는 상당한 저항을 했다고 한다. 보수진영 언론의 대표격인 월스트리트저널(WSJ)의 한 칼럼리스트는 "질 바이든이 자신의 이름 앞에 박사(Dr.)를 붙이는 것은 웃기다고 하긴 어렵지만 사기처럼 느껴진다"며 "질 박사라고 불리는 작은 흥분(스릴)은 잊고, 퍼스트레이디로서 세계 최고의 공공주택(백악관)에서 향후 4년 동안 더 큰 흥분에 만족하라"고 충고까지 했다.
예상대로 이 칼럼은 이후 성차별적인 칼럼이라며 숱한 비난이 쏟아졌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오바마는 "현재, 우리는 많은 전문직 여성들이 그들의 호칭이 박사(Dr.)이든, 부인(Mrs.)이든, 심지어 영부인이든 간에, 너무나 자주 우리의 업적에 대한 회의, 심지어 조롱에 직면한다"며 "이것이 정말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설정하고자 하는 본보기냐"고 힐난했다.
이제는 대통령 영부인이 된 질 바이든은 자신이 천명한대로 그동안 원격 강의를 해온 대학의 강의실로 출근해 작년(2021년) 9월부터 대면강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일주일에 이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대학에서 2009년부터 강의를 해 온 그는 최근 한 잡지 인터뷰에서 "누군가 대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으며, 난 강의실로 너무나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기의 고유 직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거 영부인들의 전통과 결별했다. 그는 남편이 부통령을 할 때도 대학을 떠나지 않았고, 부통령 전용기 안에서 채점을 했다고 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단지 내가 해온 일일 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뜻한다"고 했다. 당시 남편이 부통령인 것을 주변에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부통령 아내인 줄 몰랐다고 한다. 경호원들에게는 학교에서 백팩을 메게 해 의심을 사지 않게 했다고 한다. 그는 "난 학교 영어 선생이지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다"라며 자신을 다르게 대하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부부임심동체' 강조…각자 영역 구분 인정은 힘들어
전통적으로 미국 대통령 영부인들은 별도의 직업을 갖지 않았다. 남편과 자녀를 돌보는 내조 역할뿐 아니라 영부인으로서 소화해야 할 일정이 많은 때문이었기도 하다. 영부인으로서 한 해를 보낸 바이든 여사도 최근 진행한 한 인터뷰에서 "영부인에 적응하는 것이 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힘들다"고 고백했다. 이어 "영부인은 3시 또는 5시에 퇴근하는 직업이 아니다"며 "24시간 내내 일해야 하는 생활방식 같은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도 "우리는 선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역할을 정의해야 한다"며 "영부인으로서 하는 행동이나 말에는 더 많은 무게가 실린다"고 고백하며 "가끔은 두렵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 역할을 특별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제 미국은 질 바이든 교수로 인해 대통령 부인의 삶과 역할에 대해 새로운 한 발자국을 뗐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사석에서 남편에게 반말했다고 시비 걸 정도로 한가한 형편이 아니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한국을 이끌어가기에 적합한 지도자와 부인을 선택해야 한다. 지금 각 당의 대통령 후보의 부인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가로서 일하고 있다. 이제는 이들이 과연 대통령 부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알맞은 역할을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를 검증해야 한다. 영부인 질 바이든 교수가 밝혔듯이 대통령 부인이라는 자리를 두려워할 수 있는 영부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