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부끄러운 생각이 자연스럽게 몸에 밸 수 있는 예는 의외로 많다. 예를 들면, ‘상행선’ 혹은 ‘하행선’도 그렇다. 상행선(上行線)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도로나 선로 또는 교통수단을 뜻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행선(下行線)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도로나 선로 또는 교통수단을 뜻한다. 여기서도 재미있는 것은 서울로 ‘올라가고’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이다.
이런 의식 속에 ‘서울’은 단지 지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더 좋은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서울로 이사 가면 성공한 것이 되고, 낙향(落鄕)은 실패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모로 가도 서울에 가기만 하면 된다.” “서울서 뺨 맞고 송도서 주먹질한다.” 이런 속담들도 서울이 좋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는 내용들이다.
출생률 하락 이유보다 지방이라는 이유가 더 심각
지방대학 위기는 지역위기…취업차별 등 복합적 문제
서울이 아닌 지방 소재 대학들의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출산율 저하로 학령기 아동 수가 급감해 대학 입학 자원이 크게 줄고 있기 때문에 예상됐던 일이다. “벚꽃 피는 지역 순서에 따라 대학이 사라진다”는 말도 이제는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가슴 아픈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출생률이 떨어져 전국에 있는 대학들이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다기보다는 단지 지방에 있기 때문에 신입생이 오지 않는다면 이 현상은 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지방 소재 대학들이 힘들어진다는 것은 지방 자체가 힘들어진다는 것과 직결돼 있다. 지방 대학의 위기가 곧 지역의 위기다. 몇몇 지방 사립대의 폐교 이후 상황에서 경험했듯이 지방대는 단순히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방대로 인해 지역 교육이 활성화되고 경제 성장에도 보탬이 된다. 지방대 위기는 학령인구 감소뿐만 아니라 인적·물적 자원의 수도권 편중과 지방 출신에 대한 취업 차별, 지방의 부족한 생활 여건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도 나름의 고육지책을 내고 있지만 기대한 성과가 나지 않아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런 현상의 밑바탕에는 서울로 가는 길이 아직도 ‘상행선’ 즉 바람직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매우 모욕적인 문구가 한때 유행했다. 이 말은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소위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강행하자 종군기자였던 영국 '더 타임스'의 한 기자가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1955년 10월 유엔 한국재건위원회에 참가한 인도의 한 의원이 “한국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모멸적인 언사를 했다. 또한 1968년 한국이 종합제철소를 지으려 할 때도 세계은행 아시아 지역 실무담당자가 “한국이 종합제철소를 짓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우는 것과 같다”고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은 경제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 이들이 한 언사는 모두 잘못된 예측인 것으로 판명났다. 한국은 전 세계가 놀랄 정도의 민주주의를 이룩했으며, 경제 면에서도 인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혁혁한 발전을 하고 있다. 포항종합제철소는 현재 포스코(POSCO)로 사명을 바꾸고 주력 사업인 철강 이외에 다양한 산업에 진출해 있다. 전 세계 자동차 10대 중 1대는 포스코의 자동차 강판을 적용하고 있다. 2017년 조강 생산량 세계 5위에 오르는 등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 하나 외국인이 한국인의 성향을 평한 것으로 유명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에 한미합동사령부 존 위컴(John Wickham) 사령관 입에서 나왔다. 그는 당시의 정세를 전망하면서 “한국인들은 레밍(들쥐)과 같다. 그들은 언제나 지도자가 누구든 줄을 서서 그를 따른다.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한 체제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곧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그리고 그가 암시한 것이 곧 현실이 되었다.
그 후 위컴 사령관은 자신의 발언 진의가 왜곡되었다고 해명했지만 그 말을 접할 당시 한국인들은 무시당했다고 모멸감을 느꼈다. 그러니 자신이 진의가 왜곡되었다고 극구 변명했을 것이다. 자신이 들쥐로 불린다면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기분이 나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나라에 대해 그 문화적 특성을 '들쥐'로 표현한다는 것은 백번 양보해도 적절치 못한 발언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이 이제는 변했다고, 한국인에게는 그런 성향이 없다고 자신 있게 반박할 수 있을까?
요즘 큰 충격을 주고 있는 ChatGPT에게 ‘한국 문화의 단점’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AI 언어 모델로서 저는 공정함을 유지하고 당면한 주제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모든 문화에는 고유한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전체 문화를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우수하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서 인식할 수 있는 몇 가지 잠재적인 단점은 다음과 같습니다”라고 점잖게 운을 뗀 후, 첫째는 “위계적 사회: 한국 문화는 위계와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강하게 강조하며, 이는 때때로 혁신과 창의성을 억누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순응에 대한 압력: 종종 한국 문화에는 사회적 규범과 기대에 순응해야 한다는 압력이 있으며, 이는 개인의 표현과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위계와 권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고 순응에 대한 압력이 강해서 개인의 표현과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서울에서 공부해야 성공…결국 지역사회 '황폐화'
허울 좋은 지방 분권 넘어 과감한 권력 이양 필요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격언의 효력은 이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문화 속에서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서울에 와서 공부하고 직장을 가져야 성공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지방대를 골병들게 하고 지역사회를 황폐화하고 있다. 서울에서도 공부를 잘한다는 학생들은 모두 의학 계열에 지원하려고 줄을 서고, 등록 포기와 휴학을 하고 있다. 지방에서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는 서울대로, 서울대 입학생은 의학 계열로 가는 이 현상은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현재의 정치와 경제 현실이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안한 여건에서 젊은이들이 정말 하고 싶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영역에 진학하기보다는 소득이 높고 지위가 안정적이고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는 영역으로 진학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같은 분야에서도 소위 일류 대학을 나오면 더 혜택을 받는다고 여겨지는 분위기가 계속 유지된다면 서울대 의과대학을 정점으로 많은 젊은 인재들이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는 허울만 좋은 ‘지방 분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방에 권력을 과감히 이양해야 한다. 지방 대학은 지역과 긴밀한 협동하에 지방의 특색에 맞는 학문 분야를 육성하고, 지방에서도 얼마든지 안락하고 미래가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재정이 부족하다면 서울에 있는 대학들에게는 등록금 책정 등을 대학 자율에 맡기고, 그 대신 서울에 있는 대학을 길들이기 위해 공평하게 나누어 주던 보조금을 지방 대학 육성에 대폭 투자해야 한다. 교육 소비자들에게 고액을 내고 서울의 사립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아니면 값싼 등록금으로 서울의 대학을 능가하는 양질의 교육을 고향에서 받을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등록금을 강제적으로 같게 만들고 취업이나 생활 여건이 유리한 서울로 가지 말라고 하면 누가 따르겠는가? 여당이나 야당이나 조직의 장(長)을 보호하겠다고 소위 당론이라는 미명하에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을 공천을 볼모로 은밀히 겁박해 줄 세우고, 또 그런 부당한 압력에 조직을 보호한다는 궤변으로 순응하는 모습을 ‘들쥐’라고 비하해도 항변할 수 없을 것이다. 정당은 정당대로 국회의원의 자율적인 선택을 보장해줘야 한다. 그래야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미래를 예상하는 젊은이들이 한 곳으로 쏠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놓고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자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