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분야나 국제 정치적인 분야의 중요성 외에도 대한민국은 현재 문화예술 영역에서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미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BTS를 필두로 소위 K팝이 전 세계적으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성악이나 피아노 등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도 한국의 예술가들이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면서 문화 분야에서도 한국 예술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국의 경제·정치적 위상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인정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의 상황은 전통문화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합당한 대우를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유네스코(UNESCO)는 전 세계의 교육, 과학, 문화 보급과 교류를 위해 1945년에 설립된 유엔의 전문기구이다. 현재 193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으며 우리나라는 1950년에 가입했다. 그리고 문화 다양성의 원천인 무형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고, 무형유산 보호를 위한 국가적·국제적 협력과 지원을 도모하기 위해서 유네스코에서는 ‘인류무형문화유산’을 지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2003년 ‘판소리’, 2005년 ‘강릉단오제’가 지정된 이래 ‘처용무(2009)’, ‘남사당놀이(2009)’, ‘영산재(2009)’,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2009)’, ‘강강술래(2009)’, ‘가곡(2010)’, ‘매사냥(2010)’, ‘대목장(2010)’, ‘한산모시짜기(2011)’, ‘택견(2011)’, ‘줄타기(2011)’,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2012)’, ‘김장, 한국의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2013)’, ‘농악’, ‘줄다리기(2015)’, ‘제주해녀문화(2016)’, ‘씨름(2018)’, ‘연등회(2020)’, ‘탈춤(2022)’ 등 현재까지 총 22개 종목이 지정됐다. 지정된 문화유산의 개수는 총 22개로 세계에서 둘째로 많은 유산이 지정되어 있다. 그만큼 한국 전통문화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한국인 중 ‘종묘제례악’이나 ‘판소리’ 등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있지만, 이 22개 종목 모두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분야의 전문가를 제외하면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나라에 몇 개의 전통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지 별로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전통문화는 관심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무시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아도 한국의 전통문화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부터 음악을 배우고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음악’은 거의 서양음악이거나 서양의 음악 이론과 전통에 기초한 음악이다. 그리고 한국 전통음악은 ‘국악(國樂)’이라는 이름으로 구색을 맞추기 위한 정도라고 여겨질 만큼 상대적으로 적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음악 이론도 거의 서양음악의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소위 음악의 ‘3요소’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멜로디’ ‘리듬’ ‘화음’이다. 하지만 이 3요소 중 국악에서는 서구적인 의미의 화음이 거의 없다. 한국 전통음악은 주로 단선율(單旋律)이기 때문이다. 요즘 창작 국악에 관심을 가지고 작곡·연주하는 국악인들은 화음에 맞추어 작곡하지만, 이 화음은 서양음악에서 빌려온 것이다.
인류문화유산 22개 종목 등재 건수 세계 둘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는 성악과, 작곡과, 관현악과, 국악과, 음악학과, 피아노과 등이 있다. 이 중 한국 전통음악을 다루는 과는 국악과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서양음악에 편중되어 있다. 작곡과나 음악학과 등에서도 서양음악을 작곡하거나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미술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위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미술’은 전적으로 서양 위주의 미술이다. 제일 단순한 것부터 비교해보면, 초등학교 이전부터 미술 도구로 사용하는 크레파스는 서양화를 그리기에 적합한 것이다. 성장한 후에도 크레파스를 가지고 ‘사군자’ 등의 한국화를 그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화는 수묵화를 위주로 하기 때문이다. 서양화와 한국화는 즐겨 그리는 소재부터 다르다. 동양화는 주로 자연, 동물, 꽃, 산수화 등 자연의 모습을 주제로 다루는 데 반해, 서양화는 주로 인물, 풍경, 역사적 사건, 종교적 주제 등을 다룬다. 미술에서 중요한 원근(遠近)을 나타내는 방식도 한국화에서는 삼원법을 사용하는 데 반해 서양화에서는 투시원근법을 주로 사용한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는 동양화과, 회화과, 판화과, 조소과, 시각디자인과, 산업디자인과, 금속조형디자인과, 도예유리과, 목조형가구학과,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예술학과 등이 있다. 이 중 동양화과만이 전통 미술의 계승과 미래지향적인 현대 미술 문화 창달을 위해 전문가를 길러내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나머지는 서양미술이거나 서양미술적 요소를 가미한 응용미술을 전공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 시간에 서양음악을 듣고 배우며 자란 대다수 한국인이 성인이 되어 한국 전통음악을 즐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페라와 뮤지컬에 익숙한 사람이 판소리를 감상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곡에 익숙한 사람이 대금산조나 아쟁산조를 즐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악과 서양음악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태어나고 연주되기 때문에 많이 접하고 익숙해져야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길 수 있다. 국악은 우리 문화에서 태어난 음악이지만 우리에게 너무 어렵고 고루한 음악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만을 많이 들어서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회화도 마찬가지이다. ‘미술’ 시간에 서양화 일변도의 교육을 받고 자란 후 한국화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티칸의 성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압도된 사람이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즐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캔버스 전체를 화려한 채색으로 덮는 서양화에 익숙하면 선과 여백을 사용하여 정적으로 표현되는 사군자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통문화 관심 없는 세태 서양문화 위주 교육이 원인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나 예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다. 우선 우리의 전통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듯이 현재 우리의 문화가 서양 사람들에게도 호평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없는 것을 한국 전통문화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한국이 더욱 세계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선두 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부터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먼저 교육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 전통 음악과 미술을 통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감수성을 먼저 키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과목의 명칭부터 한국 전통문화 위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현재처럼 ‘미술’은 서양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한국화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서양미술은 말 그대로 ‘서양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전통문화에 자부심을 가진 국적 있는 문화인을 양성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음악’은 한국 전통음악을 지칭하고, 서양음악은 ‘서양음악’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경계가 점점 무너져 가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나’의 것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지키지 않으면 결국 ‘너’에게 존중받지 못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서구적인 미적 기준에 익숙하도록 교육시켜 놓은 후 다 큰 어른들에게 새삼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가르친다는 것은 이미 늦은 일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