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와 교권 추락…진보·보수 엇갈린 주장 팽배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학생인권조례와 교권 추락은 상관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조례가 있는 교육청이나 없는 교육청에서 거의 같은 비율의 교권 추락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수적 성향을 가진 진영에서는 교권 추락의 주요한 원인이 학생인권조례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교권 추락을 막기 위해서는 학생인권조례를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학교에서 체벌(體罰)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교육 여건과 철학이 모두 변했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교실에서의 체벌을 정당화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체벌과 폭력을 구분하고, 교사에게 교육적 목적으로 행하는 체벌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체벌과 폭력을 구분하는 주체가 교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비록 교사의 입장에서는 교육적 목적으로 체벌을 했다고 해도, 학생이 폭력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폭력이 된다. 다시 말하면, 체벌과 폭력의 구분은 처벌하는 교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학생이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또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교육 현장에서는 어떤 체벌도 용납될 수 없고, 모든 체벌은 폭력이다.
교육의 본질은 학생 훈육…교실에서의 체벌 용납 안돼
체벌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훈육(訓育)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교사는 학생을 훈육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훈육과 체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체벌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훈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녀와 학생을 훈육하는 것은 당연히 교사와 부모의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말에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표현이 있다. ‘아버지는 엄하고 어머니는 자상하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권고의 뜻도 있다. 엄한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자주 엄한 것과 무서운 것을 혼동한다. “아버지가 무섭다”라는 말도 자주 쓰인다. 무서운 아버지는 주로 체벌을 자주 하는 아버지이다. ‘무섭다’는 것은 ‘두려운 느낌이 있고, 겁나는 데가 있다’는 뜻이다. 학생들의 인성을 함양하기 위해 체벌과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느낌을 통해 행동을 조성(造成)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겁을 주어서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성이 길러질 수 없다. 다만 겁먹고 행동을 억제할 뿐이다.
엄한 것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점차 원칙을 따르는 행동을 한다. 더군다나 그 원칙이 피차 서로 합의하에 정해진 것이라면 더욱 효과적이다. 상호 합의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데 동의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칙을 엄하게 지키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하다. 훈육은 무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엄하게 하는 것을 통해 바람직한 행동을 조성하는 것이다.
최근의 불행한 사건은 학생과 교사를 편 가르는 방식으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 즉, 학생의 인권을 저해하거나 교사의 인권을 훼손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논의는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인권이 서로 상치(相馳)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마치 어린이들이 즐겨 하는 시소게임(seesaw game)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시소게임에서는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반드시 내려가게 돼 있다. 두 쪽이 다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에서는 교사의 인권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학생의 인권은 내려가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학생의 인권이 높아지려면 교사의 인권은 낮아져야만 한다.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교육은 시소게임이 아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한쪽이 많이 가지면 다른 쪽은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관계가 아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최근까지 성정체성(gender identity)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런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치부했다. 예를 들면, 남성성이 강하면 당연히 여성성이 약할 것이라고 간주했다. 또한 여성성이 강하면 남성성은 약한 것이라고 간주했다. 이런 점에서 성정체성은 시소게임의 양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를 ‘단일차원(單一次元)적 사고’라고 부른다. 단일차원의 양극에 서로 반대되는 변인을 놓고, 한쪽이 높으면 당연히 다른 쪽은 낮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본다면 자신의 생물학적 성과 일치하는 성정체성을 가지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또 그렇게 교육했다. 그래서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교육시켰다. 한 사람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동시에 높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성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다차원(多次元)적 사고’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다차원적 사고는 두 변인을 서로 관련이 없는 변인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양성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태어날 때는 남성적 성향과 여성적 성향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성적 혹은 여성적 성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성향을 동시에 가질 수 있고, 또 가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그 상황에 맞는 성향을 발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 다시 말하면 한 개인에게서 성정체성은 다차원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또 그렇게 발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본다면 남성성과 여성성은 동시에 높을 수 있고, 또 그런 상황이 바람직한 것이다.
교사·학생 인권은 '다차원'…둘 다 동시에 높일 수 있어
교육 현장에서 교사의 인권과 학생의 인권은 다차원적이다. 즉 둘 다 동시에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교육의 효과가 향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사와 학생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각해도 학생이 없는 교사는 있을 수 없고, 또한 교사가 없는 학생이 있을 수 없다. 교사라는 표현에서 이미 학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동일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만약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기본적으로 함께 있을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학생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교사와 학생과 부모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
작금의 사태는 자기 자녀만을 생각하는 소수 부모들의 빗나간 교육열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는 자신의 자녀만 배우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교육이지 공교육이 아니다. 공교육은 다양한 학생들이 한 곳에서 배우는 교육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만을 특별히 대우해 달라는 요구는 부당한 것이다. 또 그런 요구는 비교육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줄 수 없는 교육을 학교에서는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래 친구들과의 교제를 통해 앞으로 성인이 돼서 필요한 원만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경험을 익히는 것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고, 자원도 빈약한 우리나라가 세계가 놀라는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녀를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부모의 사랑과 학생들을 잘 가르치려는 교사들의 헌신적인 열정, 그리고 밤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하려는 학생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교육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사와 학생의 인권에 대한 단일차원적 논의가 안타까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교사가 존중받지 못하는 풍토에서는 유능하고 헌신적인 교사가 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좋은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이 받게 된다. 더 나아가 국력의 신장(伸張)은 공염불이 되기 시작한다. 이제는 교사와 학생 간의 시소게임을 멈추고 서로 상대를 존중하고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교육의 근본적인 목표에 대해 합의를 해야 한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