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경(三耕) 박병준(朴柄俊) 화백은 정축년 칠월 전북 고창군 대산면 중산리 원곡촌 401번지에서 출생하여 말년을 경기도 화성 동탄숲속마을에서 기거하다가 화성 함백산 추무공원에 안장되었다. 박 화백은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다각회 창립회장(1990)을 시작으로 한국미술협회, 현대한국화협회, 종로미술협회, 홍미회, 오늘회, 영남미술대전, 현대사생회, 송파미술가회, 삼원미술가회, 한국전업미술가회, 아세아현대미술교류회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동서울대학·송파여성문화회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해 ‘화가의 길’을 끊임없이 모색해 온 박 화백은 미대에 진학해 공부하며 사사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일반적인 과정을 통해 스스로 커가며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서울대의 일랑 이종상 선생에게 개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 화백은 ‘사심’이 배제된 그림을 좋아하고 추구했으며, ‘그림이란 늘 변화하고 확장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에게 이종상의 작품은 생동감과 독창적인 예술의 지표였다. 박병준은 미술사적 작품을 하나라도 남기고 싶어 했고, 그렇게 노력하겠다는 심중의 다짐을 한다.
박 화백의 작품 연대기에서 70년대 작업은 30대 후반과 40대 초의 나이로 개인전 ‘수묵채색화전’(목요미술관, 1975), ‘채색화, 수묵산수화전’(미국 뉴저지, 1979)을 열면서 드러나며 미술계의 정서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시기였다. ‘한중일 국제공모전’ 특선(중국, 1975), ‘샌프란시스코 한국우수작가 초대전’ 동상(미국, 1975),‘ AAI세계 48개국 국제공모전’ 장려상(1979)으로 자신의 개성을 발산하며 한국화의 국제화 모색을 시도하였고, 수묵 작업은 중국 작가들과의 뚜렷한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였고, 자신의 각오를 다지던 시기였다.
불혹에 접어든 80년대에 박화백은 ‘산수화전’(목요미술관, 1981), ‘수묵채색화와 화조전’(미국 LA, 1983), ‘수묵채색화 산수’(미국 LA, 1987), ‘화조화와 풍경화전’(대구시민회관, 1989)에 이르는 개인전을 열었다. ‘제7회 중앙미술대전’(한국화부문) 입선(1984), ‘KBS 전국휘호대회’(문인화) 입선(1987), 신미술대전에서 한국화부문 특선(1987)과 서예부문 우수상(1988)에 그치는 현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박화백은 일본에서 ‘중앙미술대전’ 신인상(일본, 1987.07.)과 37회 중앙미술대전 최우수상(일본, 1987.03.)의 쾌거를 이룬다.
박화백은 90년대에 전시 맛을 소지한 정제품들을 쏟아냈다. ‘무극 생명외 윤회’(백상기념관, 1993), ‘황토그림 실험 15주년 발표’(공평아트센터, 1994), ‘생명외 땅 황토 그리고 윤회’(미국뉴욕, 1995), ‘황토는 살아있다’(설악대전시관, 1995), ‘황토그림 양식화와 변’(월간아뜨리에, 1997), ‘생명의 땅 황토‘(갤러리상, 1997), ‘황토와 진경산수의 변’(무역제3전시관, 1998), ‘자연환경과 황토그림’(갤러리상, 1999), ‘생명외 땅 황토 2회’(공간갤러리, 1999)의 개인전이 빛을 발했다. 그는 일본 신주쿠 미술가협회전 우수상(1993)을 수상한다.
화가들은 항구적 재료를 찾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한다. 1960년에 시작하여 16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재료인 황토 소재로 작품화한 박병준은 한국과 세계 화단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생명의 흙을 소재로 인간의 삶을 탐구한 독창성과 진솔한 울림은 박병준의 황토화(黃土畵)를 탄생시켰다. 한국인들은 땅의 정기를 황토에서 찾아낸다. 박병준은 땅의 정기 황토를 화면에 칠하고 그림을 그린다. 아교에 황토를 갠 작업이 박락으로 끝난 뒤 찾은 아크릴용 젤 유형의 수성 종이용 미디엄은 이상적인 접착제가 되었다.
박병준 화백은 1994년 황토 작품을 첫 발표한 후 '황토의 노예', '황토는 나의 생명', '생명의 땅 황토'라는 부제로 150여 차례 국, 내외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약 3,000호 크기의 대작들로 화가만의 독특한 고집과 창작의 열정이 배어있는 개인전을 통하여 미주, 유럽에서 극찬을 받았다, 그에게 황토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며 모태이며, 땅은 또 다른 하늘이다. 그는 그림에서 전통을 살리면서 재료와 기법의 혁명적 변이를 통해 사고와 행위를 타파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 돌아가 선 곳은 바로 원점이었다.
박병준 회백은 세계 최초 황토 화가가 되었고, 한국 문화 예술계에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의 단체전 기록은 뉴욕에서 내몽고에 이르렀고, ‘샌프란시스코 한국우수작가 초대전’(미국, 1975)에서부터 ‘미술과 비평’紙 러시아 초대전(소련 래핀대학, 2008)에 이르는 다양한 기록이 있다. 상기된 기록 이후에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박 화백의 작품이 과거 청와대에 일곱 점이나 소장 되었고,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27개 언론사가 뽑은 올해의 작가상, 미국 상원의원상·시장상 등 수없이 많다. 그보다도 독특한 작품세계가 훌륭하다.
새 밀레니엄의 박병준 화백은 개인전 ‘황토그림은 나의 생명이다’(인천예술회관, 2001), ‘아름다운 나의 황토그림’(수원미술전시관, 2001),‘ 생명의 땅 황토, 점선면’(서울갤러리, 2003), ‘나는 황토의 노예다’(알파갤러리, 2003), ‘황토그림과 나’(삼성코엑스몰, 2004), ‘백토와 황토의 동반관계’(예술의전당, 2006), ‘갤러리 각 초대기획 개인전’(갤러리 각, 2008), ‘수묵채색화와 황토그림, 회고전’(세종문화회관, 2008)으로 황토 그림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보였고, New York Art Expo 대한민국 문화유산전 대상(2005), 미국 뉴저지시장 문화상(2006)을 수상하여 국제적 인지도를 확보했다. 이후 그는 후학을 지도하며 세월을 즐기듯 인생을 살아가다가 소천했다.
박 화백은 인간성 추구의 삶들에 솔선수범했다. 자연 친화적인 작품에 삶과 열정들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심장의 울림을 가져온다. 삶에 대한 온화함과 삶을 초월한 회화적 예술성은 우리의 삶 곳곳에 영원성의 상징이 되었다. 「‘동양의 혼’ 그리는, 세계 토장(土漿)의 미학자」와 「삼경 박병준 세계 최초 황토화 『봄』, 그 생명력의 큰 요람」(김영재, 미술사상가·철학박사)를 참고하여 박병준 화백의 작품과 작품세계를 살핀다. 그의 작품들은 남은 자들에게 긍정적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다름의 가치를 존중하였다.
박 화백은 방향성과 목표를 가진 삶의 가치에 집중했고, 그의 작품들은 ‘삶이 연계된 사물’을 깊이 사유하였다. 새로운 소재 탐구, 참신한 기법 창출에 몰두했다. 그는 황토에서 우리 삶의 본질을 찾았고 윤회설을 떠올렸다. 점·선·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황·백토의 채색으로 색상 변화를 추구했다. 순간의 정지가 심상의 형태가 되었고, 독창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양성적 기법 위에 황갈색의 흙을 착색의 자료로 사용한다. 그는 채색 안료의 대체제인 ‘황토’에 집착하며 ‘땅’의 생명성을 강조하는 파격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는 장지(壯紙) 위에 먹과 황토로 토속적 자연을 표현해낸다. ‘색’은 상징과 관념의 도구, 기법은 다매체 영역으로 확장된다. 전통 색감을 구현하면서 여백을 살리는 백토의 하양과 묵향이 스며든 검정, 따스한 노랑의 삼색이 어우러짐과 대비를 보여준다. 박 화백의 그림 틀은 전통적 원근, 음영의 기본 틀을 거부하고 화면 분할, 구조 변화를 추구한다. 그는 회화의 통념적 구도에서 상정되는 원근법에 의한 소실점을 배제하거나 색조의 농담(濃淡)을 거쳐 표현되는 시각적 깊이감이라는 정형을 작품에서 과감하게 배제한다.
질박한 선과 점묘에 가까운 표현으로 들과 산을 묘사하고 하늘이나 길, 인간 등의 오브제들은 채색하지 않는 여유로운 공간으로 배분해 보는 이를 배려한다. 디테일한 섬세함을 버리고 생략어법에 의해 구현된 박병준의 세계는 자연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감동, 그러한 느낌에 기인한 작자의 심미안적 포즈를 드러낸다. 일찍이 탱화와 불화, 채색화와 화조화, 인물화, 사군자, 서예와 서각에 이르기까지 한국화와 민속화의 본질을 꿰뚫은 작가의 예리한 시선은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며 모체’로서의 황토로 귀착하였다.
박 화백은 ‘황토’에 집착하며 독특하면서도 파격적인 자신만의 조형세계를 구축, 한국화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의 새로운 기법은 오늘날에 이르러 다매체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박 화백은 수련시절부터 활동 초기까지 산이나 절벽 등 웅장한 자연 소재를 강하고 남성적인 필치의 수묵화로 즐겨 그렸다. 먹의 농담(濃淡)을 통해 자신의 초기 작품 경향을 만들었다. 그가 사용한 안료도 이후 그가 유일하게 쓰는 황토처럼 붉은 계통이 아닌, 차갑고 냉정한 푸른색 물감을 주조 색으로 사용했다.
박 화백은 ‘윤회’라는 연작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본격적인 황토 작업을 시작했다. 박 화백이 안료로 ‘황토’를 택한 것은, 우직하면서도 꾸밈을 모르는 그의 성정과 닮아있다. 물감에 비해 소박한 농담의 표현이 가능하며 가장 깨끗한 흙이 황토이다. 원초적인 생명력의 상징이자 박 화백이 예술가로서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깨끗하고 매력적인 매재(媒材)이다. 황토가 나타내는 색조의 한계를 박 화백은 의미의 색채이거나 심경을 표현하는 상징의 색채로 대체한다.
박 화백은 예술적 가치나 개성보다 ‘돈’과 ‘비즈니스’로 점철된 당대의 예술계를 개탄하면서 사욕과 인맥으로 얼룩진 미술계의 자정을 촉구했다. 그런 학자다운 면모로 그는 미술계에서 늘 소박하고 욕심 없기로 소문나 있었다. 황토처럼 끈끈한 인간애와 온유한 성정이라는 평가는 인간 박병준의 인품을 짐작하게 만든다. 당시 84세가 넘은 나이에도 예술적 고집과 창작을 향한 불굴의 끈기와 지구력은 대단했다. 세계 각국에서의 포함 150여 회가 넘는 개인전과 500여 회의 그룹전으로 박화백은 한국 화단에서 존중받는 작가가 되었다.
한국적 정서 위에 박병준 회고전의 세 경향은 1) 젊은 시절의 엄정하고 투철한 수묵화와 담채화이다. 충분한 숙련에서 시작하여 기량을 닦고, 문기를 기르며, 회화의 틀 안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는 단계. 2) 자신의 세계를 추구하며 떠오른 박병준 황토화류 계열의 작품. 수묵 근간의 황백토가 그림의 재료이자 질료이고, 소재와 정서가 된다. 3) 회고전의 구색이기보다는 인물화 계열의 작품들이다. 이전 화업의 작품들이 표집의 형태로 보여졌지만, 그 초점은 황토 작업을 통해 추구한 모든 것과 황토 회화에 맞추어졌다.
삼경의 경(耕)은 벌판이라는 뜻으로 삼는다. 삼경 선생은 넓은 벌판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세 가지의 벌판이 된다. 박병준 화백은 일찍이 시와 수필로 등단했으며, 동양화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서를 익혔고, 평생을 화업에 매달렸으니 시서화를 통달한 셈이다. 그래서 삼경(석삼 밭갈이 경)이라는 뜻으로 삼경을 해석해도 됨직한데, 굳이 벌판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히 그 너른 들판을 채우기에도 자신의 업적인 미미하다는 겸손이거나 그 넓은 들판을 모두 채우겠다는 야심의 다른 표현이다.
삼경 회화의 정수는 황토 그림이다. 황토는 우주와 삶의 순환이자 시간의 굴레이다. 이 순환의 고리가 견고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황토를 사용한다. 회화에서의 황토는 변색하지 않으며, 물에 넣어도 떨어지는 일이 없는 견고한 소재이다. 물감에 비하여 단순하면서도 농담의 표현이 가능한 것이 황토였다. 성장력은 약하되 생명력이 강한 황토, 후 중에서도 가장 깨끗한 흙으로 선택된 황토는 그러므로 삼경이 이 세상에서 화가로서 남길 수 있는 가장 깨끗하고 지구력 있는 질료이자 매체이고 회화적 업적이기도 하다.
흙에서 황토만 남기면 생명력이 남는다. 여러 나라의 황토를 찾아다니고 비교 분석했다. 한국에서 호남 지방의 황토를 찾아내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계곡그 사이에 박힌 황토 알이 최상급이었다. 유리 성분이 없고 차지고 접착력이 강하면서 색깔의 강약이 있는 황토, 40년 전 작품을 오늘날 2주씩 물에 담갔다가 끄집어내어도 떨어지지 않는 황토의 마력이있다. 충청도 지방에서 1미터 남짓 윗 흙을 걷어낸 황토로 국수를 해먹었고, 자신이 황토를 한 숟갈씩 넣어 지은 밥을 먹었더니 건강해졌다고 한다. 황토는 삶의 동력이었다.
황토가 순환하는 삶과 우주 섭리의 중간에 있다 하더래도, 윤회라는 개념을 도입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박 화백은 황토의 정서적, 신앙적, 관념적 혹은 관습적 속성을 채택하지 아니한다. 한국인은 산소를 만들고 입관할 때 벽사의 상징인 황토를 뿌린다. 박병준의 회화에는 전통적 상징과 신앙은 도입되지 않는다. 황토는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린다. 인간은 뿌리로 돌아간다고 한다. 고요함에서 명으로 돌아가고 영원함이 따른다. 박병준 황토화의 평안한 느낌은 질료만의 문제는 아니며 작가의 근원 회귀의 의지 때문이다.
전북 고창 쪽에 청색 돌에서 만들 수 있는 색채가 있다. 박 화백은 황토의 순수성, 표현성, 그 속에 숨어 있는 생명력에 대한 신앙이 워낙 굳건했다. 살아있는 흙, 생명이 있는 황토에 가공된 안료를 섞을 수 없다. 다른 색이 필요하다면 화면을 하얗게 비우거나 백토로 표현할 수 있다. 작품 속에 흰색은 다른 화가의 흰색과는 매우 다른 역할과 기능, 위상을 보여준다. 길과 하늘과 물은 고유색이 가능하지만, 박병준의 작품에서는 흰색으로 나타난다. 동물이나 인물, 집 등의 형상이 하얗게 남기도 한다. 복잡한 화면의 숨통이다.
박병준 회화의 숨통은 넓다란 황토밭이다. 초기 수묵화와 천강산수를 연상시키는 엷은 갈색 톤과 먹 조화의 산수화가 있었다. 넓은 물은 황토밭으로 대체되어 화면을 장대하게 만든다. 원근법적인 거리감을 느낄 수 있는 먼 곳의 풍경들이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 형상을 암시하는 생략과 압축 기법의 풍경들이 화면의 밀도를 증폭시킨다. 황토밭과 먼 풍경 사이로 하얀 길이 그려진다. 하얗게 남기는 것이 황토 화면과 부조화되면, ‘농묵과 황토’ 바탕 위에 백토를 바른다. 조화는 화면의 통일성을 이끈다. 황토의 주장력이 극대화된다.
수직화면은 전시작에 대한 시야를 넓히면서 수평화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다. 전시장 혹은 벽면의 정적인 공간이 역동적 화면이 된다. 어떤 화면에서도 시각적, 정서적 사상적 대안으로서 등장하는 것이 길이다. 길은 경직된 화면, 복잡한 구성의 대상들, 산만하기 쉬운 구도를 통일시켜며, 장구한 세계에 대한 정서적 동경을 담는다. 세로 화면에 수직으로 치올린 길은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한다. 시선의 흐름이 무한이라는 정서적 동경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화면의 동세는 정중동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바람에 이리저리 쓰러지고 누운 밀들의 움직임으로 일렁거리는 밀밭 사이의 길은 생명의 길이 된다. 박 화백의 황토화에서는 고요 속에서 솟구치는 폭발적 움직임이 있다. 밀밭을 스치는 미풍의 바람결과 일렁이는 밀들의 미묘한 움직임이 인다. 그것이 삼경 황토화의 은밀한 생명력이다. 사실적 구도의 초기작 표현은 황토화로 진입하면서 상당히 누그러지고 때로 일그러지고 삐딱해진다. 황토가 가진 정감으로의 몰입, 황토화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다. 황토로 표상되는 이 땅의 사람들과 그들의 주거와 삶에 대한 정감적 표출이다.
박 화백은 18번째 개인전 시점에 국내외 단체전 및 초대전 319회와 각급 공모전 수상, 미국 뉴욕아트엑스포 초대전, 대한민국 문화유산대전의 대상 수상 등으로 분주했다. 그는 미국에서 2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면서, 한국화단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까지 60년간 1300여 점의 작품 활동을 해왔으며, .2017년에 마지막 전시회를 가졌다. 그의 작품들은 미술관, 박물관, 기업체, 도서관, 시카고 시청 등에 소장되었다. 그의 최초 ‘황토·백토’ 작업과 한지와 먹으로 작품화된 ‘점선면’ 작품들은 세계미술사에 남는 업적이다.
삼경 박병준 화백의 인생은 황토 인생이었고 황토의 화가였다. 만물의 어머니인 황토에서 태어나서 황토 속에서 노닐다가 황토로 돌아가 다시 눕는 인생이었다. 박병준 화백의 인생과 삶의 의미는 그림 재료와 대상과 함께 움직여 왔다. 한국의 토양에서 한국의 정서를 담고, 한국의 미학으로 무장한 박병준의 황토화는 더 이상 생산되진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 그의 예혼이 살아있는 작품을 둘려보면서 그를 기억하고 작품을 통해 셰계적인 작가로 부활하기를 염원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장석용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