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부뿐만 아니라 박 할머니는 지적장애인 11명을 집으로 데려와 20여 년간 친자식처럼 돌보며 장애인 거주시설 건립 기금 3억 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나눠야 한다"며 박 할머니는 기부를 이어갔고 2021년에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LG 의인상을 받았다. 박할머니는 기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김밥을 판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렇게 (번 돈으로) 먹을 걸 사 먹었는데 너무 행복해서 남한테도 주고 싶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면 이 행복을 줄 수 있었다. 나누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기부자의 이름이 공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익명으로 기부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작년 7월에는 익명의 기부자가 무려 거금 630여억 원을 고려대에 전달했다. 이 금액은 고려대 설립 이래 사상 최대 금액으로 알려졌다. 학교 측이 대신 전달한 내용에 의하면, 기부자는 "코로나19와 등록금 규제 등으로 대학이 겪고 있는 재정위기를 알고 있었다"며 “대한민국의 도약을 위해 대학이 분발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부를 결정했다"고 했다.
지난 3월에도 원주에서도 익명의 기부 천사가 300여만 원이 담긴 상자를 소방서 앞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원주 지역에서 풀빵 장사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기부자는 2015년 3월 풀빵 한 봉지와 현금 259만 원이 든 상자를 전달한 것을 시작으로 벌써 10년째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가 기부한 금액은 모두 3200여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때나 설날에는 이웃돕기 성금이 답지하기도 한다. 또 자연재해 등 때문에 어려운 이웃이 생기면 큰 기업을 위시해서 개인들도 성금을 보태는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흐뭇한 미담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 사회가 아직 인정이 흐르고 나보다 남을 먼저 보살피는 살맛나는 곳이라고 느낄 수 있어 마음이 따듯해진다.
이처럼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이타성(利他性)' 혹은 '이타주의'라고 한다. 이타주의는 많은 문화권에서 전통적인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또한 다양한 종교에서 오래전부터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기도 하다. 이타주의는 의무나 충성과는 달리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자기나 자신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특정한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제공하기 위한 동기를 말한다. 따라서 순수한 이타주의는 남을 위해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하는 것이다.
자신이 소유하고 싶었던 것 베풀어줘야 성숙한 '이타주의'
이타주의에는 여러 차원에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국가 차원에서 극심한 재난을 겪는 국가를 다른 나라에서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간의 이타주의는 외교라는 이름으로 주는 것과 후에 그 대가로 받을 것에 대한 냉정한 계산 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겉으로는 인류의 복지나 평화라는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철저하고 냉혹한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한 국가 안에 다양한 단체나 조직 간에 어려운 일을 당한 조직이나 개인에게 도움을 주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이타적 행위도 많이 일어난다. 국가가 개인에게 하는 시혜(施惠)도 있고, 단체와 단체 간에도 이타적 도움을 줄 수 있다. 수재(水災) 등 자연재해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회사나 시민단체에서 '의연금(義捐金)' 등을 내는 경우도 많다. 기업체 등에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에 그 동기가 순수하기보다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위의 예들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개인이 하는 이타적 행동이 가장 순수할 수 있다. 즉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을 도울 수 있다. 이타적 행동을 할 때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가장 쉽고 순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유 즉 동기도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순수하고 성숙한 이타주의는 위의 김밥할머니 박춘자님의 예에서 제일 잘 드러난다. 순수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보상(報償)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부자가 이타적인 행동을 한 경우도 칭송받아 마땅하다. 돈이 많다고 다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부자(富者) 중 소수만이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 이 경우에는 성숙한 이타적 행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숙한 성품에서 나오는 이타주의적 행동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남을 위한 행동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양한 이유로 이타적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타적 행동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바로 베풀고 있는 행동 때문에 고통을 경험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성숙한 이타주의는 자신이 받기를 혹은 가지기를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줌으로써 즐거움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이타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주는 행위 외에도 첫째는 자신이 가지고 싶었는데 못 가져서 고통을 겪었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남을 돕는 행위를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도구로 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요나 대가 바라는 숨은 동기…미소 지을 수 있으나 불편
박할머니는 기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김밥을 판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렇게 (번 돈으로) 먹을 걸 사 먹었는데 너무 행복해서 남한테도 주고 싶었다"라고 술회하였다. 김밥을 팔아 번 돈으로 먹을 것을 사 먹었을 때 너무 행복했다는 것은 그만큼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먹었을 때 너무 행복했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은 그 고통이 컸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만약 먹고 싶은 것을 사먹을 수 없을만큼 가난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면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못먹는 사람을 볼 때 자신의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가 새삼 떠오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10세의 어린 나이부터 온갖 고생을 한 그는 "자라날 아이들이 공부할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며 장학금을 희사했다. 그에게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은 숨겨야 할 과거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둘째는 그 행위를 다른 사람에게 해주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타적인 행동을 한 뒤에 즐겁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다. 강요를 받았다거나 대가를 바라는 숨은 동기 때문에 기부를 하는 경우에는 미소를 띠며 사진을 찍을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즐겁기보다 오히려 즐겁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타적 행동은 자신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생하면서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은 언뜻 보면 이율배반적이다. 하지만 박할머니는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면 이 행복을 줄 수 있었다. 나누는 일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남아도는 돈도 아니고 무덥고 매서운 날씨에도 길에서 김밥을 팔면서 번 금쪽같은 돈을 다른 사람이 행복한 것을 보면 기분이 좋기 때문에 줄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기명(記名)이든 익명(匿名)이든 또는 성숙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타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살맛 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환경과 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원래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며 함께 즐거워하는 천성이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점차 더 만연되고 있다. 이타적인 행동보다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약삭빠르게 자기 것을 챙기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은연중에 교육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고등 종교의 영원히 변치않을 핵심가치는 '사랑' '자비' '어짐(仁)'이다.
박할머니는 우리 사회에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이타적 행동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많이 가진 사람만이, 지위가 높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오히려 고생을 많이 해본 사람이, 진정으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제일 성숙한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고귀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