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또 같은 사람일지라도 여러 나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나이라고 일컬을 때는 '신체 나이'를 말한다. 즉 태어난 이후의 시간을 의미하는 나이이다. 대개의 법적인 판단이나 절차는 이 신체 나이를 기초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의무교육이 시작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취학연령은 태어난 지 7년째 되는 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민주 시민의 가장 소중한 권리인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등 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선거에서 유권자로 투표할 수 있는 나이, 즉 선거연령은 18세다. 이외에도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정년이 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퇴진하는 정년퇴직도 신체 나이에 근거한 것이다. 또 개인의 경제생활과 직결되는 국민연금이나 기초연금 수급도 신체 나이를 기준으로 정해진다.
과거 관습에 얽매이는 것은 현재를 '지각사회'로 고착화
'심리적 나이'는 심리적 성숙도를 의미한다. 생활연령이 같은 사람들과 비교해 환경 변화 등에 얼마나 잘 적응하며 예기치 못한 생활사건이 주는 스트레스에 얼마나 잘 대처하는지를 측정한다. 일정한 직업도 없이 40세에도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은 독립적이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30세에 비해 심리적 나이가 더 어릴 수 있다.
'사회적 나이'는 개인이 속한 사회에서 자신의 나이에 적합한 역할을 얼마나 훌륭히 수행하는지를 의미한다. 즉 한 사회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정해진 나이를 의미한다. 40대 중반에 첫아이를 가진 여성은 사회적 나이가 늦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중요한 생활사건, 즉 결혼·취업·출산 등에서 사회적으로 적당한 시기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적당한 사회적 나이에 생활사건을 해결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압력을 가한다.
사회적 나이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한 개인의 결혼과 취업 등 중요한 생활사건과 이 사건이 일어나는 적절한 시간대를 규정해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결혼을 예로 들면, 법적으로 개인이 결혼할 수 있는 최소 나이는 만 18세로 정해져 있다. 이 나이가 되기 전에는 부모의 동의 없이는 결혼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만 18세에 결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해 결혼에 적합한 사회적 나이는 신체 나이보다 훨씬 늦다.
우리 사회를 '지각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적 나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떤 현상을 '지각(遲刻)'이라고 부르려면 특정한 일을 해야 하는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지각사회'라고 부르려면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특정한 생활사건이 일어나기 적절한 시간대라고 암암리에 정해준 시간대보다 늦게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모든 생활사건에 대해 사회가 시간대를 정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회가 효율적으로 유지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생활사건에 대해 더욱 강하게 사회적 압력이 가해진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사회 구성원이 지속적으로 충원(充員)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갓난아이가 끊임없이 태어나야 한다. 모든 면에서 아무리 뛰어난 조직이나 사회라 할지라도 새로운 구성원이 보충되지 않으면 결국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사회는 구성원들의 결혼과 출생에 신경을 쓴다. 동시에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해 큰 영향을 끼친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잘 해결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사랑(Lieben)'과 '일(Arbeiten)'이다. 사랑이 맺어지는 근본적인 형태는 결혼이고, 일은 직업을 통해 승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회적 나이가 제일 위력을 발휘하는 영역이 바로 결혼과 취업이다. 우리 사회가 지각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이 두 생활사건(life event), 즉 결혼과 취업이 사회가 적당하다고 정해놓은 시간대보다 늦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시간과 관련해 고려할 점은 '제때'와 '벗어난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제때(on-time)'는 사회적 시간대 안에 해당 생활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벗어난 때(off-time)'은 사회적 시간대보다 너무 일찍 일어나거나 늦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을 예로 들면, 우리 사회에는 소위 '결혼 적령기'가 있다. 결혼 적령기에 혼인을 하면 '제때'에 잘 한 것이라고 인정받는다. 하지만 너무 일찍 결혼하는 '조혼(早婚)'이나 늦게 결혼하는 '만혼(晩婚)'은 '벗어난 때'에 한 것이므로 사회적 압력을 많이 받는다.
결혼•취업•출산 등 생활사건 적정 시기에 맞추려는 경향
우리나라는 취업과 결혼, 출산이 과거의 사회적 시간에 비해 점점 늦어지는 '지각사회'에 접어들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요즘에는 30대 초반 신입 사원과 40세 전후 신랑·신부, 40대 초반의 아기 부모를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이 현상은 몇 가지 주요한 통계지표로 쉽게 알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30년 전인 1993년과 비교할 때 2023년 우리나라 여성이 처음 결혼하는 평균 나이는 31.5세로 약 6.5세 올랐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작년 초혼 평균 나이가 약 34세로 5.9세 올랐다. 초혼 나이가 늦어지면서 연쇄적으로 첫애를 낳은 엄마의 평균 나이도 같은 기간 약 26.2세에서 33세로 약 6.8세 높아졌다.
초혼 시기와 아울러 처음 취업하는 시기도 덩달아 늦어지고 있다. 한 취업 포털에서 작년 9월 취업 준비생과 직장인 등 897명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들은 신입 사원 나이의 마지노선으로 남자는 평균 33.5세, 여자는 평균 31.6세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전 같은 조사보다 남자는 1.7세, 여자는 1.6세 상승한 결과다. 그만큼 30대 초반 신입 사원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취준생과 직장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지각사회'로 변화한다고 염려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지각'이라는 용어 자체가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고, 그 시간에 맞지 않는 것은 부정적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취업 등의 주요한 생활사건에서 '지각'하고 있다는 것은 적절한 시기가 있는데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사회적 시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지각하고 있다는 것은 정해진 시간이 고정돼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하루 중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학교에 와서 공부할 수 있다면 지각이라는 현상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또 등교하는 시간을 넓혀 준다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학생도 줄어들 것이다.
30대 신입사원•40대 아기부모 사회적 시간은 계속해서 변해
현대로 올수록 사회적 시간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다. 동시에 사회적 시간대가 넓어지고 있다. 그만큼 사회가 다양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어딘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까지 살 일이었다. 동시에 '적령기'에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도 심했다. 하지만 요즘은 '비혼(非婚)'이라는 말도 낯설지 않을 정도로 결혼은 전적으로 개인의 결정에 달린 사안이 되고 있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압력이 이제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 활동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제는 소위 '결혼 적령기'나 '취업 적령기' 자체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그 시기(on-time)에 꼭 결혼이나 취업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도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개인의 판단과 사정에 따라 생활사건이 일어날 시기와 방법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과도기(過渡期)'이다. 과거의 관습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재가 '지각사회'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지각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삶의 어느 시기에 고착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어느 사회도 모든 구성원에게 특정한 시기에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도태될 뿐이다. 끊임없는 변화가 있을 뿐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