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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애로운 어머니·냉철한 학자로서 성공적인 삶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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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애로운 어머니·냉철한 학자로서 성공적인 삶의 '전형'

[힐링마음산책 (303)] 성인발달과 버니스 뉴가튼 교수에 대한 회상
유한킴벌리 디펜드가 19일 서울 관악구민종합체육센터의 ‘디펜드 설문버스 캠페인’ 론칭 현장을 찾은 ‘액티브시니어’들이 ‘디펜드 설문버스’에서 요실금 증상에 대한 대처방법을 묻는 설문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유한킴벌리 디펜드가 19일 서울 관악구민종합체육센터의 ‘디펜드 설문버스 캠페인’ 론칭 현장을 찾은 ‘액티브시니어’들이 ‘디펜드 설문버스’에서 요실금 증상에 대한 대처방법을 묻는 설문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작년 12월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20%가 넘었다는 뜻이다. 고령화사회가 되면서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라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다. 이들은 오랜 경제 활동과 사회 경험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으며, 자녀 양육이나 업무 등에서도 자유로워 시간적으로도 여유롭다.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의료기술의 발달로 거동이 힘들 정도로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갈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세대다.

이 ‘액티브 시니어’라는 용어는 미국 시카고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오랫동안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남긴 버니스 뉴가튼(Bernice Neugarten) 교수가 제시한 개념이다. 이분은 필자의 학문적 경력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친 분이므로 이번 칼럼에서는 이분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1916년 네브래스카주 노퍽의 작은 마을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해 21세에 이미 시카고대학교에서 영문학과 프랑스 문학에서 학사 학위를, 교육심리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27세인 1943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 후 8년은 아들과 딸을 키우며 가정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전업주부로 생활했다.

1951년 다시 시카고대학교 교수로 복귀해 학자로서 눈부신 학문적 업적을 이루기 시작했다.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진행된 ‘캔자스시티 성인생활 연구(Kansas City Studies of Adult Life)’를 이끌었다. 이 연구는 가족, 일, 여가, 삶의 만족도를 조사한 중년과 노령에 대한 획기적인,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한 연구였다. 그녀의 연구는 노인에 대한 많은 편견과 신화를 타파하고 개별 노인의 요구에 맞게 서비스를 조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9월이었다. SK그룹 최종현 선대회장께서 1974년에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해외유학장학생(2기)으로 선발된 필자는 자신의 모교인 시카고대학교를 남달리 사랑하시는 최 회장님의 권유와 실질적인 여건 등으로 1979년 시카고대학교 심리학과로 유학 갔다. 가을 학기에 단순히 'Middle Age and Aging(중년기와 노화)'라는 강의명만을 보고 신청했다. 긴장과 설렘으로 참석한 첫 시간에 미국인치곤 키가 작은 할머니 교수가 나타나면서 강의가 시작됐다. 그때 그녀는 63세고, '성인발달'이라는 분야 자체를 접해보지 못한 필자는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첫 시간에 무슨 내용을 말씀하셨는지는 하나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강한 첫 인상을 준 조그마한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편하게 자신의 이름(first name)을 부르는 것을 허용한다. 예를 들면, 필자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교수는 첫 시간부터 자신도 자기 이름을 부르기 어렵다면서 “마이크(Mike)”라고 부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강의 말미에 한 학생이 질문을 하기 위해 “버니스”라고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면서 “언제 내가 너에게 ‘버니스’라고 부르라고 했니? 앞으로는 ‘뉴가튼 교수(Professor Neugarten)’라고 불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질문하려던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학생들도 순식간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는 학생 하나도 없이 굉장히 위축돼 있었던 필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자신이 쓴 논문을 읽고 장단점을 밝힌 3장의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그다음 시간이 끝날 즈음 학생들이 보고서를 제출했다. 각 학생이 제출한 보고서를 받아 든 그는 3장 이상 쓴 보고서는 3장만 남기고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다시 돌려주었다. 또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대개 중요한 결론은 마지막에 쓰기 마련인데 3장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니 사태가 심각해진 것이다. 분위기를 파악한 그는 “여러분은 앞으로 전문가가 될 사람들이다. 전문가는 다른 사람의 요구에 따를 줄 알아야 한다. 3장을 쓰라면 3장 안에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밝혀야 하고, 30장을 쓰라면 그에 맞출 줄 알아야 한다. 3시간을 강의해 달라면 3시간에 맞춰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하고, 30분 동안에 해달라면 그 안에 해야 한다”며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설명했다.

몇 번의 보고서를 제출한 후 한 번은 필자가 쓴 보고서 말미에 빨간색으로 “Be more aggressive!”라는 평을 해주었다. 다시 말하면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밝혀라”라는 말이었다. 한국에서도 대학원을 다니면서 여러 번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더 적극적으로 밝히라는 평을 받기는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했다. 어떻게 직접 강의하시는 대학자가 쓴 논문을 마음 놓고 비판하라니! 그 이유에 대해 “선배 학자들을 존경해야 하지만, 그 권위에 눌리지는 말아라!” 수강한 학생들에게 학기 말에 해주신 말씀이다.

뉴가튼 교수님을 학자로서 존경하게 된 필자는 그다음 학기에도 그의 강의를 수강했다. 학기가 시작된 뒤 얼마 후 교정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필자를 부르더니 학교 생활에 대해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그러더니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는지 물어보셨다. 한국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지만 아내와 아들과 생활하기는 어렵다는 사정을 얘기했더니 왜 학교에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학교 방침에 한 곳에서만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고 하길래 신청 안 했다고 대답했더니 오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다시 학과 사무실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학과장에게 “이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셨다. 학과장이 이미 지난주에 장학생 선발이 끝났다고 하니 다시 한번 위원회를 열면 되지 않느냐고 다시 부탁하셨다. 그리고 필자는 결국 학교 장학금을 받게 됐다. 그때 학과장이 위에서 언급한 박사 학위 지도교수가 된 '마이크' 교수였다.

그러고는 자기 집으로 아내와 아들을 초대해 주셨다. 처음으로 미국 교수댁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내와 필자는 한편으로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당시 두 살이 채 안 된 아들이 낯을 심하게 가리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초대해 주었는데 아들이 울거나 떼를 쓰면 어쩔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어서 약속한 날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 노크를 하니 문이 열리고 부군께서 문을 열어주면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뉴가튼 교수님은 부엌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장만하고 계셨다. 인사를 나누고 필자와 아내는 부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옆방에서 아들의 소리가 들려 낯가림을 하는 줄 알고 놀라서 가보니 그와 함께 놀면서 너무 재미있어서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였다. 그는 마치 동네의 평범한 할머니처럼 아들을 껴안고 바닥을 함께 뒹굴면서 그렇게 재미있게 놀아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분이 바로 첫 시간부터 모든 대학원 학생들을 얼어붙게 만든 그 깐깐한 교수님이란 말인가? 처음에는 너무 놀라운 광경이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아들과 재미있게 놀아주는 그가 눈물이 나도록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그 후 시카고대학교에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님의 지도로 쓴 석사와 박사 학위 논문의 대상은 노인이었고, 주제는 ‘생활만족도’였다. 자녀가 존경하는 부모와 ‘긍정적 동일시’를 하며 닮아가듯이, 필자는 버니스 뉴가튼 교수의 삶을 존경하면서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필자는 유학 갈 때 노인을 대상으로 연구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버니스 뉴가튼 교수님이 필자에게 준 학문적 영향은 크다. 필자는 귀국해 교수가 된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은 버니스 뉴가튼 교수님”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필자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단순히 학문적 업적뿐만이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또 한 여성으로서 그를 존경한다. 요즘에는 여성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많이 달라졌다. 조금 구식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지만 그는 여성의 삶에서 중요한 세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고, 또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첫째, 한 남자의 아내로서 훌륭한 삶을 살았다. 그는 남편이 1990년 타계할 때까지 50년간 서로 공통의 주제와 관심을 공유하면서 해로(偕老)했다. 또 어머니로서도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다. 그는 두 자녀를 잘 양육하기 위해 학자로서의 삶을 8년간 유보하고 어머니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그 결과 딸인 도일 A. 뉴가튼은 심리학 교수로서 어머니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노년학 및 인간발달 분야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들인 제럴드 리 뉴가튼은 하버드 법대 법학박사 출신으로 공공 서비스에 헌신한 법조인의 삶을 살았다.

이처럼 버니스 뉴가튼 교수가 부인과 어머니로서, 또한 학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바탕에는 한 가지 역할을 할 때는 완전히 그 역할에만 몰두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녀는 강의실이나 연구실에서는 냉정하고 철저한 학자의 역할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더없이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부인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만 헌신했다. 이처럼 ‘지금 현재’ 자기가 수행하는 역할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각 영역 간의 철저한 분리가 가능해야 한다. 또한 각 영역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적 성숙을 기반으로 한다는 걸 말할 필요도 없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이미지 확대보기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