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마음 산책(304)] 인정욕구와 법인차

허세와 관련된 속담도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냉수 먹고 이 쑤신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 “가난할수록 기와집 짓는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등이 회자되고 있다. 사자성어로는 ‘허장성세(虛張聲勢)', '외화내빈(外華內貧)' 등이 있다. 속담 외에도 건축물의 이름을 보아도 잘 나타난다. 서울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28개 중 철교가 4개 있는데, 다리 이름은 성수대교, 마포대교 등 거의 '대교(大橋)'다. 진정한 대교는 이름을 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후세에 물려줄 수 있는 튼튼한 다리야 한다.
지난해 1억원 넘는 고가 수입차 판매량이 8년 만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서는 그 원인의 하나로 법인차의 연두색 번호판 부착을 꼽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고가 수입차를 구매하는 이들은 자동차를 과시의 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만큼, 법인차로 구매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눈총을 받을 것을 우려해 판매가 줄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우려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쪽”이 팔린다는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연두색 법인차 번호판을 단 고급차를 타면 '하차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남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개인이 사는 대수는 늘어났다고 한다.
'하차감(下車感)'은 차에 탔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인 ‘승차감’에 반대되는 신조어로, 차에서 내렸을 때 차종이나 외관 등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승차감은 차의 자체적 기능에 의한 편의성과 안락함이 주요인으로,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다. 상대적으로 값이 싼 소형차라고 해도 개인에 따라서는 오히려 비싼 고급차를 타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더 승차감이 좋고 편안하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하차감은 차에서 내렸을 때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통한 자부심이기 때문에 사회적이다. 다시 말하면, 하차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혼자 살고 있는 외딴섬에서는 하차감이 느껴질 수 없는 이유다. 하차감을 느끼기 위해서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고가의 수입차를 타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브랜드나 디자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하차감을 즐기기 위해서는 국산이라도 비싸서 일반인들은 소유하기 어려운 최고급 차를 타야 한다. 그러나 자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법인차 등 빌린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법인차, 즉 타인의 차라는 것을 널리 알리는 연두색 번호판은 하차감을 높이기보다 오히려 떨어뜨릴 수도 있다.
하차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최소 두 가지 요인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그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보아야 한다. 심리학자 매슬로(A. Maslow)는 ‘다양한 욕구가 위계를 갖는다’는 욕구단계설을 주장해 유명해졌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이론의 핵심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선천적 생존본능에서부터 개인의 사회적 발달을 통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욕구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욕구들이 위계를 지니며 어떤 욕구는 다른 욕구에 비해 훨씬 강력한 동기를 갖는다는 것이다. 욕구 단계는 대개 보다 근원적이고 강력한 욕구를 밑에 두는 피라미드 형태로 표현된다. 근원적인 욕구는 생존이나 안전처럼 생물학이다. 이 욕구들이 어느 정도 만족되면 다음에는 소속과 인정의 욕구, 즉 사회적인 욕구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 욕구들이 충족되면 자기실현처럼 개인적인 욕구가 나타난다.
클레이턴 앨더퍼(Clayton Alderfer)는 매슬로의 다섯 단계 위계를 요약해 세 단계로 단순화한 ERG 이론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생존(Existence), 관계(Relatedness), 성장(Growth) 욕구가 포함되며,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욕구 단계를 유동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매슬로의 주장과 다르게 욕구가 항상 하위 단계에서 상위 단계로 이동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한국 문화에서 허세가 하나의 방어기제로까지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방어기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잠재적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적인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조절하거나 왜곡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자아가 사용하는 책략”이다. 방어기제 이론의 근원이 되는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기본적인 욕망을 성욕과 공격욕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것은 성욕과 공격욕뿐만 아니라 표현되었을 때 사회적 비난을 받을 염려가 있는 다양한 부정적 감정도 포함할 수 있다.
'허세'가 방어기제가 되기 위해서는 허세를 부림으로써 부정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현실적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냉수 먹고 이 쑤신다”라는 속담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현실은 고기를 먹을 수 없고 냉수밖에 먹을 수 없을 만큼 비참하다. 하지만 이 현실을 그대로 남들에게 보여주면 돌아올 것은 ‘냉대’와 ‘멸시’밖에 없다. 이 사실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마치 고기를 먹은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면서 이를 쑤시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실제로 고기를 먹은 사람이 이를 쑤시는 것은 허세가 아니다.
고급 외제차를 자신의 능력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구태여 법인차를 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경제력은 없는 사람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가의 외제차를 타며 ‘하차감’을 즐기려면 그 차가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실질적인 구매력은 없지만 타인에게 과시하려면 법인차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허세를 부려야 한다.
우리 사회에 허세가 만연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먼저, 한국 사회는 ‘체면’을 중시한다. 체면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남’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나’가 주체가 되어 ‘남이 뭐라고 하든 내가 좋으면 된다’라는 생각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다시 말하면, 나에 대한 평가의 주체가 ‘나’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되고 나는 평가의 객체가 된다. 내가 어떤 차를 타는 것을 좋아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차를 타야 남들이 나를 높게 평가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할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외모(外貌)와 외양(外樣)이다. 따라서 체면이 발달한 문화에서는 ‘겉모습 꾸미기’가 행동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고급 외제차뿐만 아니라 최고급 명품 의복이나 시계, 핸드백 등이 많이 팔리는 이유도 동일하다. 기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과시(誇示)하려는 본마음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그만큼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는 방증도 될 수 있다. 자신이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기 위해 무리해서 비싼 물건을 과소비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아주기를 바란다.
허세의 밑바닥에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인정에 목마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동시에 자기도 자신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정받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것은 미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외양이 아니라 실속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속은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눈속임이나 허세를 부려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슬로나 앨더퍼의 이론에 따르면 인정욕구가 만족되면 성장욕구, 즉 자기실현의 욕구가 나타난다. 진정한 인정은 남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할 때 얻어진다. 하차감을 즐기기 위해 값비싼 외제차를 무리해서 운행하는 것보다 자신의 형편에 맞는 차를 타며 만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동차는 이동하는 데 필요한 편리한 도구일 뿐이다. 편리한 도구를 이용해 성실하게 노력하면 진정으로 자신이 선호하는 차를 타며 승차감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승차감은 스스로 즐기는 주관적 감정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필요치 않는다.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차를 타고 매일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차감이 아니라 승차감이다. 승차감은 단순히 기계적인 안락함뿐만 아니라 심리적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 비록 소형차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만족하면 승차감은 좋을 수밖에 없다. 허세를 부리기 위해 무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가의 법인차에 연두색 번호판을 부착하면서 오히려 50대의 구매가 증가하는 현상이 바로 실속과 외관이 일치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인 여력이 있는 사람이 고가(高價)의 차를 구매하는 것은 과소비도 허세도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결과를 즐기는 것뿐이다.

-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