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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 안무 '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흔적', 현대무용의 새로운 전형 제시한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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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 안무 '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흔적', 현대무용의 새로운 전형 제시한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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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 안무의 '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흔적'
9일자 15면입니다~ 4월 4일(금) 저녁 8시, 4월 5일(토) 낮 4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C2Dance(예술감독 최상철 중앙대 교수, 대표 김정훈) 주최·주관, 이지민 안무의 '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흔적'이 공연되었다. 안무가는 제목의 주제성에 집중하여 인간 본성을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작품은 인간과 종(種)에 걸친 사고의 우화적 현상, 종이 벌이는 다양한 상상, 기본 색상의 유희, 인간의 양면성 등을 전시한다. 이지민은 중앙대 무용과·교육대학원·박사에 이르는 다부진 수업 시대를 거쳐 현대무용의 또 다른 한 축의 중심을 세우고 있다.

과작(寡作)의 안무가 이지민(중앙대·계원예고 출강)은 안무작 'SEED'(2018), '모피를 입은 난 여자'(2020), '꼴통품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너'(2021, 서울무용제 우수상), 크리틱스초이스 'Blood moon'(2022, 우수안무자상), 크리틱스초이스 '당신은 누구시길래?'(2023), 제8회 C2Dance 정기공연 'Blood moon'(2024), 제9회 C2Dance 정기공연 '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흔적' 등으로 자신의 안무 역량을 알려오고 있다. 엄혹한 시절의 유희적 혼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춤에 대한 열정으로 그녀는 창작에 열중해 왔다.

2025년 전반부의 알찬 공연이 된 현대무용 '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흔적'은 시적이며 철학적인 명제를 소지한다. 인간은 존재의 소멸이나 왕조의 멸망 같은 개인적 경험을 넘어 존재한다. 안무가는 평범으로 포장한 이지적 안무작을 통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유영하는 인간의 기교, 다양한 갈래의 수사된 예술, 인간의 모호한 정체성, 사회적 연관성을 총체적으로 탐구한다. 오늘날의 기술적, 문화적 변화 속에서 인간 본연의 감정과 사회적 유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관객에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흔적'은 오브제 활용으로 존재와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인간과 기술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깊이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모든 과정을 통해 기술 발전이 인간의 정체성과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되짚으며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모든 것이 기록되고 저장되는 시대이지만, 인간의 감각은 더 쉽게 잊히고, 희미해진다. 이 작품은 ‘몸’이 감각을 기억하고, 흔적을 남기며, 존재의 연속성을 증명할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움직임 하나하나는 기억의 잔상이자 새로운 기억이다.
무대는 ‘기억의 공간’이자, ‘기술이 개입된 감각의 장치’이다. 벽, 꽃, 마네킹, 구조물 등의 오브제들은 무용수의 감각을 자극하고 움직임을 유도한다. 오브제들은 각각 감정의 파편이자 정체성의 은유이며 기억을 시각화하는 물리적 장치이다. 공중에 매달린 마네킹이나 구조물 등은 무용수들과의 거리, 접촉, 회피를 통해 관계의 긴장감을 만든다. 존재의 경계에 다가서는 몸과 사물 간의 접점을 보인다. 개방된 듯 보이는 무대에서 반복과 축적, 해체가 일어나며 ‘정적이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의 밀실’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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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낯선 만남(Encountering the Unknown); 낯선 시선이 스친다. 관객과 무용수가 서로를 인식하고 마주하는 긴장된 순간으로 시작한다. 무대는 마치 낯선 공간처럼 설정되며, 무용수들은 익명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관계를 모색한다. 오브제와 조명은 이 ‘처음의 낯섦’을 강조하며,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가 흐려지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무용수의 동선은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을 점차 공연의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그 안으로 초대되고, 흔적을 남긴다.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기술과 인간 사이의 이질감이 스며든다.

2막: 기억의 파편(Fragments of Memory); 기억은 선형적이지 않다. 기억이 조각나고, 감각의 파편들이 충돌하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과정이 전개된다. 움직임은 단절되고 불규칙적이며, 무용수들은 서로 다른 감정의 기억을 소환하는 듯한 흐름으로 전개된다. 해체되는 동작들은 모두 감정의 잔재로 작용하며, 기억은 마치 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시각적으로 구현된다. 음악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흐름을 깨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음악은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또 하나의 ‘감각적인 공간’이 된다.

3막: 시각화된 리듬(Rhythm of Visibility); 개인의 움직임이 점차 집단적 리듬으로 응축되고, 공감각적 흐름이 형성된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강해지며, 무용수들의 몸은 리듬 그 자체이다. 소리와 빛, 신체와 공간의 상호작용이 극대화되며, 시간의 흐름이 몸을 통해 형상화된다. 무용수들이 같은 구조 속에서 서로 다른 호흡을 만들어내며 ‘개별성과 집단성’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자연의 소리, 기계음, 빠른 박자감, 모두가 알고 있는 클래식, AI가 변형한 사람의 목소리까지 다양한 사운드를 겹쳐 사용된다.

4막: 색감의 환영(Illusion); 감각이 해체되고, 시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점에 도달한다. 어둠 속에서 퍼지는 색채의 흐름, 마네킹과 꽃, 신체의 조합은 환영처럼 살아난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정체성과 감정이 다시금 피어나며, 하나의 커다란 기억의 공간이 된다. 무용수들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정을 환기하고, 관객의 감각 속에 흔적을 남긴다. 관객은 한 편의 기억을 따라가듯, 존재가 사라지고 다시 피어나는 여정을 신체적으로 경험한다.

‘꽃’은 탄생과 소멸, 추모와 기억의 상징이다. 무용수는 벽 사이에 꽃을 꽂거나, 바닥에 떨어뜨리며 기억을 맺고 푸는 제의를 수행한다. 관객은 이 꽃을 통해 인간이 무엇을 기억하려 하고, 어떻게 감정을 떠나보내는지를 직관한다. 공중의 ‘마네킹’은 존재하지만, 감각이 없는 몸, 비인간적 인간 형상의 상징이다. 무용수는 마네킹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가거나, 그 근처에서 동작을 멈추면서 자기 존재와의 거리감이나 정체성의 부유를 표현한다. 마네킹을 등지고 앉아 ‘나 아닌 나’를 외면하는 움직임이 펼쳐지기도 한다.

다양한 크기의 ‘종이상자’는 ‘벽’, 바닥이 되어 움직임을 유도하거나 차단하는 환경이 된다. 무용수는 종이상자 위를 오르고, 구멍 사이를 들여다보며 기억을 탐색하듯 움직인다. 종이상자는 겉으로는 단단하고 비인격적인 물체지만, 내부에 꽃을 꽂거나 앉아 기다리는 행위를 통해 기억의 집이나 내면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모든 오브제는 신체와 끊임없이 관계하며, 관객이 기억·존재·감각을 '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돕는다. 무대는 정적인 배경이 아니라, 끊임없이 감정을 저장하고 환기하며, ‘움직이는 기억의 장소’로 작동한다.

'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흔적'에서 조명은 ‘기억의 흐릿함’과 ‘정체성의 출현’을 시각화한다. 빛은 인물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감추고, 감정의 흐름과 공간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벽의 앞·옆면에 시차를 둔 입체 조명은 ‘기억이 쌓이는 장소’이다. 조명의 색 수사는 감정의 층위를 다양하게 드러내고, 그 변화는 장면 해석에 상상력을 유발한다. 흐릿한 백색 조명은 사라짐의 느낌을 강조하고, 스팟 조명 속에의 인물은 기억 속 단편이 되며, 무용수의 움직임을 ‘기억의식’처럼 느껴지게 하며, 기억이 신체에 새겨지는 순간을 시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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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 안무의 '사라지는 순간, 남겨지는 흔적'

이 작품은 완성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관객 스스로 질문을 유도하며 자신만의 감정과 기억을 꺼내게 한다. 안무가는 우리의 몸·기억·존재가 지나간 자리엔 무엇이 남을 것인지를 탐구한다. 무용수들(김동현 도연희 유민희 이정우 하연수 유태준 조준서 박지오 이은영 김준태 주한유)의 움직임은 한 동작, 한 걸음마다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은 무대 위에 남았고, 조명이나 오브제를 통해 다시 반응하며 변형되었다. 남겨진 흔적은 곧 ‘기억’처럼 작동한다. 이 작품은 ‘기억’과 ‘소멸’ 사이에서 무엇을 남기고 있는지를 묻는다.

“기록되는 것보다, 감각되는 것이 더 오래 남는다.” 정보를 저장하고 데이터를 남기는 시대이지만, 인간은 감각을 통해 기억하고, 몸을 통해 흔적을 남긴다. 이 작품은 그 차이에 주목한다. 사라지는 듯 보이지만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감정, 설명 불가의 몸의 기억, 잔상 같은 흔적이 있다. 기억은 부정확하고, 흔적은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인간적인 감각의 증거이고, 몸이 경험한 세계의 기록이다. 이 작품은 이 시대에 인간의 정체성과 감정이 어떻게 출몰하고,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고 ‘남겨지는지’를 몸 언어로 뜨겁게 증명했다.

이지민(C2Dance 정단원, 안무가)이미지 확대보기
이지민(C2Dance 정단원, 안무가)


현대무용가 이지민은 기술혁명이 불러온 거대한 조류 속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소중한 흔적들을 기억해 낸다. 빛나는 문명의 시대에도 아날로그적 감성은 능가할 수 없는 소중한 힘의 원천이 된다. 거대한 흔적으로 남겨진 조형을 하나씩 떼어내 보면 응축된 이야기들이 모두 값어치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완전한 소멸은 없다. 다만 희미해질 뿐이다.’ 창의력이 돋보이는 상상력은 늘 압도적 감동을 준다. 철학적 명제의 장(場)들이 촘촘히 들어박힌 소멸과 흔적의 기억은 놀라운 움직임과 더불어 수작(秀作)으로 등재되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촬영 옥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