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기어박스 생산을 위한 설비에 많은 투자를 했다. 빈패스트(Vinfast)와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인데 현재는 도면을 기다리고 있다. 품질높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한국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IDMEA 쩐 카오 콰잉 CEO)
하노이에 있는 VITASK(베트남생산현장애로기술지도사업) 센터가 만난 현지 기업들 사이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VITASK센터는 한국자동차연구원(KATECH), 전자부품연구원(KETI), 한국산업기술대학교(KPU), (주)아이티엘(ITL), (사)아시아교류협력센터(ACC) 등 한국 5개 기관이 참여하고 베트남 정부(기관)와 대학 등과 협력을 통해 현지 기업의 소재부품 기술역량 제고, 전문 인력 양성, 시험분석 지원, 양국 기업 간 교류 확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의 상시 운영을 통해 국내 기업의 성공적인 해외 진출과 베트남 제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우리정부의 지원사업이다.
첫번째 키워드는 내수시장이다. 확실한 현지의 공급처가 생겼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내수시장은 빈그룹이다. 빈그룹의 자동차 생산 자회사인 빈패스트와 전기전자분야 생산 자회사인 빈스마트가 확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사실 핵심 제조산업인 자동차와 전기전자분야의 부품 현지화는 베트남 정부의 오랜 숙원사업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현지 기업들의 반응은 그동안 '소 귀에 경 읽기'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자금사정이 좋지 않은 현지 기업들 입장에선 부품 현지화를 위한 설비 투자가 부담스러웠다. 설사 자금 여유가 있다손 치더라도 삼성이나 현대 등 기준이 높은 글로벌 기업들의 협력업체(벤더사)로 선정될 가능성도 크지 않았다. LG, 도요타 등 글로벌 브랜드들은 너무나 먼 존재였다.
그러다보니 일부를 제외하곤 돈은 돈대로 날리고 납품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컸다.
실제 베트남 삼성은 현지 정부의 요청으로 기술교육 등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통해 부품 현지화에 나서고 있지만 현재까지 벤더사로 선정된 현지 기업은 20여곳 남짓하다. 그마저도 제품박스나 엑서서리 정도를 만드는 업체다.
지난 2018년 삼성의 협력업체 선정발표 당시 '베트남인들의 손으로 나사 하나 못 만드냐'는 한탄이 나온 이유다.
당시 베트남 현지에서는 외국인직접투자(FDI)기업들이 세금혜택만 받고 기술이전 등 현지화에는 관심이 없다고 비판했지만 실상은 부품 현지화 의지가 있는 기업을 찾기 어려운것이 현실이었다.
■ 빈그룹 ‘매직’ 부품 현지화 앞당기나(?)
올해부터는 이야기가 다르다. 베트남 최대 민영기업인 빈그룹이 만들어낸 내수시장이 생겼다. 빈그룹의 부품 현지화 클러스터 조성작업도 빠르게 진행중이다.
지난 2018년 빈그룹은 자동차(빈패스트)와 스마트폰(빈스마트)의 국내생산을 선언했지만 부품은 전부 수입했다. 당시에는 현지 기업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야심차게 시장진출을 알렸지만 한동안 구매 고객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결과가 없었다. 하지만 각종 시행 착오를 거친 결과물들이 깜짝놀랄 실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올초부터 판매가 늘면서 지난 4월에는 5124대를 팔아 완성차 시장에서 5위를 차지하며 다크호스로 부상한 빈패스트는 한달 뒤인 5월 기준 가장 많이 팔린 모델 톱10에 경차인 '파딜'과 세단 '럭스(Lux) 2.0'이 이름을 올렸다.
빈스마트가 내놓은 스마트폰은 첫 제품 출시 이후 17개월 만인 올해 4월을 기준으로 베트남에서 시장 점유율 16.7%를 기록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모양새다. 경쟁력 있는 가격과 획기적인 프로모션, 자국민들을 향한 애국 마케팅 등이 제대로 먹혀 들었다.
빈그룹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시작하자 베트남의 부품 기업들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자신들과 협력할 수 있는 든든한 자국기업이 만든 내수시장이 생겼다는 믿음 때문이다.
호아락 첨단공업지대, 하이퐁 빈패스트 부품공단 등을 보유한 빈그룹이 베트남 최대 부동산 개발 자회사인 빈홈즈를 통해 최근 다른 지역에도 공단을 조성해 지원사격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 것도 현지기업들이 부품 현지화를 위해 움직이는 이유 중 하나다. 특히 빈그룹의 오너인 팜 녓 브헝 회장의 '베트남을 위하여'라는 성향도 한몫했다.
빈그룹은 소매시장에서 거대한 외국기업에 효율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어렵게 구축한 전국 유통체인(빈마트시스템)을 베트남 1위 식음료 기업인 마산에 넘겼을 정도로 '애국'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다.
호찌민에 세워진 베트남의 마천루 빈컴 '랜드마크81'을 세울 때도 초고층 타워건설 경험이 풍부한 한국기업의 입찰선정이 유력한 상황에서 포기 상태에 가까웠던 현지 건설사인 코테콘에 브헝 회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베트남의 손으로 최고의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독려한 사실은 유명한 일화다. 결국 랜드마크81은 코테콘의 손으로 지어졌다.
■ 개방되는 시장, 기술 없어 밥그릇 위기
하반기부터 부품 현지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내수시장이 생겼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산업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 놓지 않으면 결국 남는 것이 없다는 위기감이 크게 다가오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의 발발로 많은 FDI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베트남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애플이다. 애플은 베트남에서 에어팟 생산량의 30%를 생산하는 것 외에도 루머로만 떠돌던 차세대 오버이어 헤드폰인 '애플 에어팟 스튜디오' 역시 베트남에서 소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베트남 현지에서 애플의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은 폭스콘을 비롯해 페가트론, 럭스쉐어, 고어텍 등 대부분 중국계 업체들이다. 생산기지만 베트남일 뿐 돈을 벌어가는 실제 위탁생산업체는 FDI 기업들인 셈이다. 현지에서 애플 제품을 생산할 기술을 가진 베트남 기업들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쉬워 하거나 한탄할 여유조차 없다.
베트남은 오는 7월부터 유럽(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다. 현재 영국과도 별도로 양자무역협정을 논의중이다. 빠른 부품 현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나마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지게 된다.
베트남 산업 통상부 관계자는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생산기지가 이전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그러나 만약 10년 뒤 임금증가 등 FDI 기업들이 떠나게 되면 지금처럼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베트남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며 반문했다.
그는 "국내시장이 자유무역협정으로 개방되면 베트남은 다른 국가의 소비시장으로 전락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현지 국영매체인 베트남넷은 섬유 및 신발산업에서 FDI기업의 수는 20%, 현지기업은 80%를 차지하지만 매출액은 FDI기업이 80%, 현지기업이 20%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자유무역협정이 '편하게 그냥 수입하자'라는 심리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예로 지난해 국회 과학기술 환경위원회에서 열린 '베트남 기계공학 산업 현황 및 촉진 솔루션'세미나에서 자동차와 섬유산업은 부품의 80~90%를 수입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경제에 무역적자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의견을 들었다.
푸엉 꾸옥 히엔(Phung Quoc Hien) 국회 부의장은 "베트남이 시장경제로 전환했을 때 기초산업 부문을 강화했어야 했다"며 "뿌리가 되는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고 바로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것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일이다"고 평가했다.
응웬 티 홍 행 글로벌이코노믹 베트남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