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만 물가 상승률이 평행선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일본 중앙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올해 및 내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각각 0%, 0.9%로 전망됐다.
주요 경제선진국들의 물가 급등세가 전세계를 덮치고 있는 공급망 경색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저물가 현상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저물가 현상이 반가운 일만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물가는 오르지 않으면서 경제 성장이 정체되는 ‘일본화(Japanification)’ 현상이 구체화된 것으로 해석하면서 다른 주요 선진국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는 사례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일본 고유의 저물가 현상의 배경을 짚어봤다.
일본 물가가 오르지 않는 배경
일본 중앙은행에 따르면 일본의 소비자 물가는 지난달 기준으로 전년 대비 0.1% 상승하는데 그쳐 벌써 수십년째 지속되고 있는 저물가 추세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이다. 신선식품 가격과 에너지 가격을 집계 대상에서 제외하면 일본의 소비자 물가는 오히려 0.7% 하락한 상황.
같은 시점 기준으로 미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6.2%를 기록, 31년 만에 최고점을 찍고 유로존 소비자 물가도 4.1% 상승한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국제유가 및 상품가격 상승을 비롯해 다른 나라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서 일본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의 기업들과 소비자들이 이에 반응하는 태도에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예컨대 미국 기업들은 원자재 가격이나 수입 가격 등이 급등해 발생하는 손해를 제품 가격 인상을 통해 상쇄하고 있는게 현재 일반적인 추세. 그러나 일본 기업들은 올 연말까지 가격을 올리지 않겠다고 공표한 경우가 많다. 밀가루, 마요네즈, 스파게티 등의 가격을 동결시킨 일본 최대 유통업체 이온그룹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온그룹 대변인은 WSJ와 인터뷰에서 그 배경에 대해 “일상적인 필수 소비재의 가격이 오르는 것을 일본 소비자들이 바라지 않는 분위기라서”라고 설명했다.
의류, 생활용품, 식품 등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는 전문 소매체인으로 유명한 무인양품을 운영하는 료힌케이카쿠그룹 역시 취급하는 품목 가운데 190개 품목에 대한 가격 인상을 지난 7월부터 이달까지 동결했다.
WSJ에 따르면 여러 가지 배경 가운데 일본의 고령화가 점차 심화되는 가운데 소비자들의 소비력이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 일본 기업들이 섣불리 가격 인상에 나설 수 없도록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전문가들은 해석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일본이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평가한 것도 일본의 소비 구조를 둘러싼 이같은 사정을 고려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경제 성장에는 독
일본에서 물가가 쉽게 오르지 않는 배경은 어느 정도 확인이 되지만 문제는 저물가 기조가 경제 성장에는 독이 된다는 점이다. 물가가 오르지 않으면서 월급도 오르지 않고 정체되는 문제와 그 결과 근로 의욕이 떨어지면서 경제 성장 동력도 떨어지는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것.
기우치 다카히데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WSJ와 인터뷰에서 “안정적으로 경제를 이끌어가려는 일본 고유의 관리 방식에다 물가에 함부로 손대지 않는 접근 방식이 경제에 미칠 단기적 충격을 줄인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다”고 밝혔다.
기우치는 일본을 대표하는 거시경제 전문가로 일본은행 금융정책위원을 지낸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산업구조를 장기적으로 개선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장기적인 경제 성장동력을 저해하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기우치 이코노미스트는 “물가가 오른다는 것은 기업들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큰 소비가 크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해 어디에 투자를 벌여야 하는지를 결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이같은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근로자들 역시 전망이 좋은 분야로 진출해 능력을 발휘하고 처우를 향상시키는 계기로 삼는게 경제 성장의 일반적인 방향”이라면서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런 메카니즘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게 문제”라고 이같이 지적했다.
여기에다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임시직 일자리는 그동안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경제 성장의 주요 동력인 종신 고용 문화에 여전히 젖어있는 대기업들이 신규 채용이나 경력직 영입에 적극 나서지 않는 등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도 일본 경제의 발전 가능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혜영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