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선진국 가운데 장시간 노동으로 유명한 미국의 고용시장에서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선진 경제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회원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21년 기준으로 미국민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1791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16시간을 웃돌았다.
유로존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에 비해서도 442시간 더 일하고, 영국에 비해서도 294시간 더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보다 더 길게 일하는 나라는 한국을 비롯해 칠레, 멕시코, 그리스, 코스타리카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미국 유력 일간 워싱턴포스트(WP)가 최근 취재한 결과에 따르면 이 통계를 크게 손질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정규직으로 일하는 미국민은 감소하는 대신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미국민이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을 중심으로 한 고용주들이 풀타임으로 일하는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대폭 늘린 결과로 분석된다.
비정규직 일자리가 이처럼 크게 증가했다는 것은 좋게 보면 정규직에 대한 정리해고에 나서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기업들의 노력을 반영한 결과로 해석될 여지도 있고, 나쁘게 보면 미국 기업들이 머잖아 대대적인 정리해고 국면에 들어설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비자발적 美 비정규직 근로자 3년 만에 최대 폭 증가
WP는 미 노동통계국의 집계 자료를 인용해 지난달 현재 비자발적인 이유로 비정규직으로 일한 미국인은 420만 명 수준으로 파악됐다고 보도했다.
이는 전달 대비 45만2000명(12%) 증가한 것으로 비정규직으로 일한 근로자의 증가 폭이 이 정도에 이른 것은 미국 고용시장에서 3년여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WP는 “지난달 비정규직으로 일한 미국인 420만 명은 스스로 비정규직을 선택하지 않은 경우”라며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비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을 선택했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WP는 “경제 전문가들은 특정 통계만을 근거로 향후 전망을 내놓은 것에 유의해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면서도 비자발적인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증가했다는 것은 향후 감원 돌풍이 닥칠 가능성을 비롯해 노동시장의 변화를 예고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고 전했다.
이와 무관치 않게 구인·구직 플랫폼 집크루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근로자들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최근 4개월 동안 34시간대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업들이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비해 정규직을 줄이고 정규직이 해오던 일을 비정규직에게 맡기는 식으로 인건비를 절감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분석되는 가운데 특히 시급제로 일하는 정규직, 저임금 정규직, 정규직으로 일하는 흑인과 히스패닉계 노동자, 이민자 출신 정규직 근로자 등이 이런 흐름의 여파로 가장 먼저 큰 타격을 입는 것으로 지적됐다고 WP는 전했다.
◇자발적 비정규직도 증가세
기업 차원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줄이고 있는 것과 아울러 미국민 사이에 직장 개념이 달라지고 있는 것도 비정규직 일자리의 비중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자발적으로 비정규직 또는 프리랜서로 일하려는 미국인도 역시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서다.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미국 노동당국이 집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 5월 기준으로 알바·프리랜서를 비롯해 비정규직 형태로 생계를 이어가는 미국인이 2180명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5% 증가한 수준이고, 10년 전과 비교하면 15%나 크게 증가한 수준이다.
그 배경에 대해 비정규직 전문가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애빙턴캠퍼스의 로니 골든 교수는 “은퇴 국면을 맞은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 아직 직장을 떠나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이 자발적인 비정규직 증가세에 한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그러나 더 큰 배경으로는 직장 생활과 개인의 삶 사이에 균형을 중시하는 새로운 풍조가 확산된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