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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CEO] 닛산-혼다 통합…알고보니 폭스콘(Foxconn) "궈타이밍(郭台銘) 노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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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CEO] 닛산-혼다 통합…알고보니 폭스콘(Foxconn) "궈타이밍(郭台銘) 노림수"

궈타이밍 폭스콘 창업자 겸 대주주. 사진=폭스콘 이미지 확대보기
궈타이밍 폭스콘 창업자 겸 대주주. 사진=폭스콘
일본 자동차 대기업인 닛산과 혼다가 합병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대만의 전자 대기업인 폭스콘 (Foxconn) 이있다. 폭스콘의 중국어 공식 기업 상호는 훙하이(鴻海科技集團)이다. 폭스콘이 경영난에 빠진 닛산에 경영 참여를 시도하면서 닛산은 물론이고 닛산과 협력한 혼다 역시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폭스콘이 닛산 경영 참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올 가을부터다. 폭스콘은 차기 성장 동력으로 전기차(EV)를 선언하고 지난해 닛산 출신인 세키 쥰을 EV 사업을 이끄는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영입했다. 세계 EV 시장의 점유율 40%를 차지하겠다는 장기 목표를 부여받은 세키 CSO는 과거 몸 담았던 닛산에 관심을 두었다. 일본 닛산은 2010년 EV 리프를 성공시킨 경험이 있는 회사다.
일본의 경제신문인 닛케이는 “폭스콘은 닛산 투자를 통해 EV 제조 노하우와 글로벌 판매 네트워크를 확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폭스콘은 닛산 경영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 신탁은행이 보유한 닛산 주식을 주목했다. 르노는 1999년 경영난에 빠진 닛산의 지분 43%를 인수하며 최대 주주가 됐다. 이후 르노는 2023년 23년만에 닛산 보유지분율을 43%에서 15%로 낮추면서 양사의 지배구조를 대응하게 만든다는 데 합의했다.프랑스 르노는 보유한 닛산 주식을 단계적으로 매각하기 위해 이를 일시 프랑스 신탁은행에 맡겼는데 지난해 9월 기준 여전히 22.8%의 닛산 주식이 신탁은행에 남아 있었다. 폭스콘은 이 주식에 관심을 둔 것이다.
닛산은 폭스콘의 이같은 움직임을 감지하고 물밑에서 인수 방어를 위한 대책을 논의하고자 했다. 혼다 역시 폭스콘이 경영에 참여할 경우 지난 8월 닛산과 체결한 포괄적 업무 제휴가 무효화될 것이란 우려를 품고 있었다. 자동차 산업이 내연기관차에서 EV로 전환되고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 전기차의 공세가 격해지면서 양사 모두 위기감이 팽배한 상황에서 이뤄진 닛산 혼다 협약이었다. 르노와의 자본 관계를 약화해 규모의 경제 효과가 줄어든 닛산으로서는 함께 비용을 줄이고 투자를 나설 파트너가 절실했고, 혼다 역시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자체 개발 기조를 무너뜨리고 닛산을 협력 파트너로서 선택한 것이다. 양사는 차를 제어하는 차량용 소프트웨어의 공통화는 물론, EV의 주요 부품인 구동장치, 충전기 설치 등도 함께 해나간다는 구상이었다.

혼다는 폭스콘이 닛산을 상대로 적대적 공개매수(TOB)에 나설 경우 닛산의 백기사로 나설 가능성도 검토하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들어 폭스콘이 닛산 인수에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세키 CSO가 프랑스 파리에서 루카 데 메오 르노 최고경영자(CEO)와 회담을 잡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 와중에 닛산의 경영환경은 더욱 악화됐다. 주력시장인 미국과 중국에서의 판매부진이 심각했으며 올해 4~9월기(2025회계연도 상반기) 연결 순이익은 192억엔으로 전년동기 대비 94% 급감했다. 이 가운데 행동주의 펀드인 에피시모 캐피탈 매니지먼트가 지난 11월 닛산 주식 2.5% 취득해 제 5대 주주에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으로 향후 미국시장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진 상황, 이런 가운데 우치다 마코토 닛산 사장은 인수 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해 혼다와의 합병 협의에 들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닛케이는 우치다 사장과 세키 CSO의 악연도 언급했다. 세키 CSO는 2019년 12월 닛산의 최고집행책임자(COO)로 취임해 닛산의 넘버3가 됐으나 취임 직후 일본전산(니덱)으로 이직했다. 이 때문에 우치다 사장은 세키 CSO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닛산이 주요 주주로 있는 미쓰비시 자동차도 장기적으로 합류하는 것을 염두에 두며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와 배터리 등에 대한 투자 부담을 함께 부담하는 체제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3사 통합이 실현된다면 현대·기아차를 제치고 연간 판매 대수가 800만대를 초과하는 세계 3위 자동차 그룹이 탄생하게 된다.

일본 정부도 양사의 합병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다. 무토 요지 경제산업상은 인터뷰에서 "일본 자동차 산업의 경영환경이 악화되고 있다며 “좋은 움직임”이라고 밝혔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역시 이날 기자회견에서 “개별 기업의 경영에 관한 사안으로 코멘트를 삼가한다”면서도 “일본기업이 변화에 대응해 국제 경쟁을 이기기 위한 노력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대만의 떠오르는 별 훙하이는 궈타이밍이 창업했다. 훙하이 창업주는 궈타이밍(郭台銘)이다. 영어권에서는 ‘테리 궈’로 쓴다. 궈타이밍은 1950년생이다. 올해 69세이다. 궈타이밍 부모는 중국 본토 대륙의 산시성 사람들이다. 한족인 아버지는 일제 시대 경찰간부로 근무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모두 장악할 때 국민당 정권을 따라 타이완으로 망명했다. 만약 그대로 중국 산시성에 남았다면 문화혁명 때 어떤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 궈타이밍은 부모의 망명 이듬해 타이완의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을 기준으로 하면 타이완 사람이기는 하지만 본토 산시성에 뿌리는 뚠 외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중국과 타이완의 경계인인 셈이다.

쿼타이밍은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초·중·고를 이수한 후 해운회사 실무자를 양성하는 타이완의 중국 해사전과학교를 다녔다.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타이완해양기술학원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해양대학교 비슷한 곳이다. 그는 1971년 당시 잘 나가던 해운회사인 타이완 부흥항운공사에 입사했다. 그 회사에서 무역 실무를 담당했다. 수출입 업무를 하면서 바다 건너 해외시장에 눈을 뜨게 됐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친구로부터 플라스틱 제조 하도급 업체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미국에 TV 플라스틱 리모콘을 납품하는 일이었다.

궈타이밍은 자신이 국제무대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직접 플라스틱 회사를 차려 모니터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그때 궈타이밍이 국제화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흑백TV용 모니터 하도급사가 홍하이 플라스틱이다. 창업 연도는 1974년이다. 창업에 들어간 납입자본금 7400달러는 어머니로부터 받아 충당했다. 이 회사가 바로 오늘날 타이완의 꿈인 홍하이 그룹의 모태다. 홍하이 플라스틱이 출범할 즈음 오일쇼크가 터졌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산유량을 줄이면서 국제유가가 급등한 것이다. 그 바람에 플라스틱 제조원가가 폭등했다. 홍하이 플라스틱으로서는 원가 상승의 쇼크를 감내하기 어려웠다. 궈타이밍은 지금도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한파의 시기라고 말한다.

은행 융자로 근근이 버티어 가던 중 1980년 기회가 왔다. 홍하이 플라스틱이 유가파동 속에서도 원청회사와의 납품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사실이 없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고 있던 미국 아타리(Atari)사가 접근해 온 것이다. 아타리는 당시 세계 최대의 게임기 제조회사였다. 그 회사가 흥하이에 콘솔용 조이스틱과 게임기를 연결하는 커넥터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해오면서 훙하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궈타이밍은 아타리 납품을 계기로 TV 모니터는 그만두고 게임기와 PC용 부품회사로 변신했다. 회사 이름도 홍하이정밀공업으로 바꾸었다. 제품 브랜드는 글로벌 무대에서 널리 통용될 수 있도록 영어 폭스콘(Foxconn)이라고 명명했다. 이 폭스콘은 훗날 홍하이정밀 공업의 영어 회사명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폭스콘의 궈타이밍은 그해 미국 대륙 대장정에 나섰다. 11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돌면서 컴퓨터와 게임기 회사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물론 시장조사는 사전에 완벽하게 했다. 미국 기업인들을 만나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부품들을 정확하게 찍어내 더 싼 가격으로 양질의 부품을 공급하겠다며 거래를 제안했다. 아타리 납품사라는 사실도 강력하게 어필했다. 궈타이밍의 이 무모한 시도는 큰 성과를 냈다. 수많은 미국 기업들로 엄청난 물량의 주문을 받아냈다. 그 당시 미국의 PC와 게임기 산업은 기술 발전 속도가 무척 빨랐다. 생존 경쟁도 심했다. 그런 만큼 질 좋고 싼 부품을 확보하는 것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대한 변수였다.

궈타이밍은 그러한 재계의 사정을 정확하게 꿰뚫어 거래를 성사시켰다. 당시 궈타이밍이 대장정을 돌며 미국 기업들로부터 따온 주문은 홍하이 그룹이 오늘날 세계 재벌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이 됐다. 궈타이밍의 첫 부인은 동갑나기인 린슈루(林淑如) 여사다. 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1976년생인 아들은 지금 영화회사 오너다. 1978년생 딸은 금융인이다. 첫부인 린 여사는 2005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첫 부인이 사망한 후 궈타이밍의 여자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숱한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러다가 2008년 24세 연하인 발레리나와 결혼했다. 그가 지금의 부인인 증신잉(曾馨瑩) 여사다. 증 여사와의 슬하에 2009년생 아들과 2010년생 딸이 있다. 2016년에 또 한 명의 딸을 출산했다.

궈타이밍의 경영 철학은 고객 제일주의다. 삼성이 인재 제일주의인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인재는 네 번째, 관리는 세 번째, 설비는 두 번째, 그리고 고객은 첫 번째로 중요하다는 것이 홍하이 그룹의 기업 이념이다. 고객을 최고로 받들어 모시는 이 같은 기업 이념은 홍하이가 원청 고객의 주문을 받으면서 세계 최고의 하도급사로 발돋움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 궈타이밍이 이번에는 전기차에 베팅을 하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