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독일 경제에 탈산업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제조업 강국으로 명성을 쌓아온 독일이지만, 에너지 비용 상승, 노동력 부족, 규제 강화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산업 기반이 약화되는 추세다. 이는 독일 경제의 근간을 흔들며 미래 성장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 에너지 비용 상승, 경쟁력 약화 초래
독일은 지난 2011년 발생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에너지벤데(Energiewende)'를 기치로 내걸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크게 높이는 동시에 원자력 발전을 단계별로 폐쇄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장기의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하지만, 단기 에너지 비용 급등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에너지 수급 불안정과 가격 변동성 심화는 독일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너지 가격 급등은 독일 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독일 상공회의소 연합회(DIHK) 설문 조사에 따르면, 약 40%의 기업이 독일 내 생산 축소 또는 해외 이전을 검토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 이전을 고려하는 기업들은 비용 절감과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이유로 꼽았다. 이는 독일의 에너지 정책이 기업들의 경영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원전 가동 연장 및 LNG 도입 확대 등을 통해 에너지 공급 안정화를 꾀하고 있다. 또한,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고 기업의 에너지 비용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 노동력 부족, 인구 구조 변화 심화
설상가상으로 저출산·고령화라는 인구 구조 변화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져 독일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생산 가능 인구는 감소하는 반면, 첨단 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숙련 노동자 부족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이는 산업 생산성 저하와 인건비 상승으로 이어져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난 9월 독일 산업협회(BDI)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의 제조업 인력 부족은 연간 약 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로 인해 많은 기업이 생산라인 축소 또는 자동화를 도입하고 있지만, 자동화는 초기 투자 비용이 높아 중소기업에는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숙련된 노동자의 부족은 단순히 자동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력 양성과 교육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
독일 정부는 숙련 노동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민 정책을 완화하고, 직업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여성과 고령층의 경제 활동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정책도 추진 중이다.
◇ 규제 강화, 기업 환경 악화 가속...경제·사회 영향 심각
환경 규제와 노동 관련 법규 강화는 기업 운영에 추가적인 부담을 주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이러한 규제에 대응할 자원이 부족해 경영 압박을 받고 있다. 독일 산업협회(BDI) 조사에 따르면, 독일 경제의 어두운 전망 때문에 생산 거점을 해외로 이전했거나 이전을 고려하는 기업이 증가하는 추세다.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규제를 완화하고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하여 기업의 혁신 역량을 강화하고, 새로운 산업 성장을 위한 지원 정책도 마련하고 있다.
이 탓에 독일의 산업 생산은 감소 추세를 보인다. 킬 세계경제연구소(IfW Kiel)와 독일경제연구소(IW)는 2024년 독일의 경제성장률을 각각 0.1%로 전망했으며, 독일 정부는 -0.2%로 예상했다. 이는 정부의 긴축 경제정책에 따른 높은 불확실성, 기업 투자계획 감소, 제조업과 건설 부문의 부진, 지정학 갈등의 악영향 지속, 그리고 구조 위기 등이 복합으로 작용한 결과다. 독일 경제 전체로는 2024년에 매우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거나 심지어 역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독일 경제학자들은 탈산업화가 지속될 경우 독일이 유럽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위치 또한 위협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특히, 제조업은 독일 경제의 핵심 기반이며, 탈산업화는 독일의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탈산업화는 단순히 경제 지표 악화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제조업 일자리 감소는 실업률 증가와 소득 불균형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전통적인 제조업 지역은 산업 공동화 현상과 인구 유출, 지역 경제 침체 등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사회 불안정과 계층 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에 독일 정부는 탈산업화로 인한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실업자 재교육 프로그램, 지역 경제 활성화 지원, 사회적 안전망 강화 등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 디지털 전환, 새로운 돌파구 될까?
랄프 빈터게르스트 비트콤(Bitkom) 회장은 "기업 유지와 투자 촉진을 위해 구체적인 정치적 조치가 필요하다"며, 관료주의 철폐와 행정 디지털화를 핵심 과제로 꼽았다. 독일의 디지털 전환은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 산업 재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열쇠로 평가된다. 디지털 전환은 단순히 기술 도입을 넘어, 기업 문화와 프로세스 혁신을 동반해야 한다.
독일의 탈산업화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복합적인 이슈다. 산업 경쟁력 회복을 위해서는 에너지 정책 재검토, 노동력 확보를 위한 인구 정책, 기업 친화적인 규제 환경 조성 등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독일이 이러한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미래 경제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독일은 과거에도 여러 경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해왔다. 탈산업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독일이 어떤 해법을 제시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