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기업들이 국경을 넘어 해외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는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라는 브랜드 파워로 대변되는 독일 제조업의 자부심이 흔들리는 가운데, 기업들은 치솟는 에너지 비용, 심각한 노동력 부족, 과도한 규제 부담에 등을 돌리고 있다. 이러한 '탈(脫)독일화' 현상은 독일 경제의 경쟁력과 산업 생태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 에너지 비용 폭탄, '탈출 러시' 부추겨
에너지 비용 급등은 기업들이 독일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특히 에너지 집약산업인 철강, 화학, 시멘트 산업은 독일 내 높은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하면서 독일 제조업체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독일의 산업용 전기료는 유럽연합(EU) 평균의 두 배에 이르며, 이는 기업들의 수익성을 악화시키고 글로벌 경쟁력을 훼손하는 주범으로 꼽힌다.
디르크 얀두라 BGA(독일 연방 도매·외국무역·서비스협회) 회장은 "대기업들은 이미 해외 이전을 시작했고, 중소기업들도 생산 시설을 해외로 옮기거나 아예 사업을 접고 있다"며 "독일 산업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독일의 대표적인 화학기업 바스프(BASF)는 지난해 루트비히스하펜에 있는 본사 규모를 축소하고 일부 공장을 폐쇄하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이는 독일 산업 공동화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 숨 막히는 규제, 기업들 '탈출구' 찾아 헤매
높은 에너지 비용뿐 아니라, 독일의 경직된 노동 시장과 복잡한 규제 환경 또한 기업들의 해외 이전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최근 몇 년간 독일에서는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환경 규제 강화 등 기업 경영에 부담을 주는 정책들이 잇따라 도입되었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이러한 규제에 대응할 여력이 부족하여 경영난을 호소하고 있다.
독일 상공회의소 연합회(DIHK)는 "많은 기업이 독일 내에서 더 이상 성장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다면 해외 이전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독일 산업협회(BDI) 조사 결과에 따르면, 45% 이상의 독일 기업이 향후 5년 내 생산 시설 일부를 해외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특히 인건비가 저렴하고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동유럽과 동남아시아 지역이 주요 이전 대상지로 떠오르고 있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과 가족 기업들도 해외 이전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라이너 둘거(Rainer Dulger) 독일 가족기업협회 회장은 "중소기업들은 대기업보다 규제와 비용 압박에 더 민감하다"며 "해외 이전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은 해외에서 더 나은 시장 접근성과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하고 있으며, 특히 성장 잠재력이 큰 동남아시아 및 미국 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해외 이전은 국내 산업 생태계 약화와 기술 유출 가능성이라는 양날의 검을 지니고 있다. 독일 정부는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동시에, 국내 산업 공동화를 방지하기 위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기업 기술 혁신, 해외 시장 공략...독일 경제는 기로
일부 기업들은 독일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 혁신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인공지능(AI), 사물 인터넷(IoT), 로봇 기술 등을 생산 현장에 도입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기업은 기술 혁신만으로는 비용 상승과 규제 장벽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해외 시장 공략을 통한 성장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특히 미국과 중국 시장에서 생산 확대를 추진하고 있으며, 독일 내 공장을 축소하거나 폐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평가된다. 글로벌 시장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해외 시장 진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기업들의 탈독일화는 독일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예고한다. 산업 기반의 해외 이전은 일자리 감소와 경제 성장 둔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독일 정부는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도입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피터 아드리안(Peter Adrian) 독일 상공회의소(DIHK) 회장은 "독일 경제 회복을 위해서는 기업들이 독일에 머물도록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며 규제 완화, 세제 혜택, 인프라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일 정부는 탈산업화 흐름을 막고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 지원을 펼쳐야 할 것이다.
독일 기업들의 '엑소더스'는 단순한 해외 이전을 넘어, 독일 경제의 미래를 뒤흔드는 거대한 도전이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제조업 강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 독일은 '탈산업화'라는 깊은 터널을 지나고 있다. 과연 독일은 이 터널의 끝에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까? 뼈를 깎는 구조 개혁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이뤄낼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될까? 독일 경제의 운명은 이제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