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승리 이후 달러 강세가 가속화하면서 아시아 주요국 통화들은 일제히 수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9일(현지시각) 미국 경제 매체 CNBC는 ”통화가치 하락으로 수입 물가 상승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아시아 중앙은행들의 정책 결정에 있어 셈법이 복잡해졌다“고 평가했다.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지수는 트럼프 당선인이 지난해 11월 5일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약 5% 넘게 상승했다. 달러 지수는 지난해 9월의 직전 저점 대비로는 9% 넘게 올랐다.
트럼프의 대선 승리 이후 일본 엔화를 비롯해 한국 원화, 중국 위안화 및 인도 루피화 등 아시아 주요국 통화가 모두 거센 하락 압력에 직면했다.
CNBC는 "트럼프 당선인의 관세 부과 위협 속에 통화 가치 하락이 아시아 주요국의 수출 경쟁력을 높일 수 있겠지만, 아시아 중앙은행들은 수입 물가 상승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면서 자국 통화의 지속적 약세에 대한 투기적 베팅을 방지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정책 전망에 대한 재평가도 아시아 통화에는 하락 요인이다. 전일 공개된 지난달 연준의 정책회의 의사록에 따르면 연준 위원들은 인플레이션 압력과 트럼프 당선인의 정책이 미칠 불확실성을 언급하면서 금리 인하 속도를 늦출 것임을 시사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아시아 주요국의 국채 수익률 격차가 확대되면서 아시아 통화 가치를 한층 끌어내렸고 이 지역 중앙은행의 개입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온라인 브로커 회사인 타이거 브로커스의 제임스 우이 시장 전략가는 "달러 강세는 수입 물가 상승을 통해 아시아 주요국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일 것"이라며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개입을 통해 자국 통화를 지지하려 할 경우 외환보유고 감소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고물가 및 통화가치 하락으로 힘겨운 싸움을 하는 상황에서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는 것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中 위안화, 16개월 만에 최저
미국 국채 수익률 상승과 달러 강세 여파로 중국 위안화는 지난 7일 16개월 만에 최저치인 7.3361위안으로 떨어졌다.
위안화 약세는 중국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성장을 촉진할 수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모닝스타의 로레인 탄 아시아 주식 리서치 책임자는 "위안화 약세는 인민은행(PBOC)이 자본 유출 증가위험 없이 금리를 인하할 수 있는 여지를 제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또한 위안화의 급격한 약세가 중국과 수출 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과 대만 및 동남아시아 국가 경제에도 타격을 줄 것이라고 언급했다.
엔화, 6개월 만에 최저
일본도 엔화 약세에 대응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엔화는 이날 지난해 7월 이후 최저치인 158엔대에 거래됐다.
일본은행(BOJ)은 지난해 엔화가 달러 대비 161.96엔까지 급락하며 수십 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자 통화 가치 하락 방어를 위해 15조3200억 엔(약 970억6000만 달러) 이상을 썼다.
일본 당국은 최근에도 "엔화의 일방적이고 변동성이 큰 움직임에 대해 우려한다"면서 엔화 약세에 거듭 우려를 표명했다.
모닝스타의 탄은 "달러 강세는 일본은행이 엔화 가치를 떠받치고 인플레이션 위험을 완화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원화, 15년 만에 최저...루피는 사상 최저
한국 원화도 사정이 좋지 않다. 원화는 지난 연말 달러 대비 1487원대까지 떨어지며 200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후 한국은행의 개입이 추정되고 국민연금의 환 헤지 거래도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화는 1450원대로 소폭 반등했지만,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 시장 불안감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인도 루피는 전방위적인 달러 강세와 지난해 10월과 11월 강력한 외국인 포트폴리오 투자자금 유출로 하락세가 가팔라졌다. 루피는 지난 8일 사상 최저치인 달러당 85.86루피까지 떨어졌다.
지난달 통화정책회의에서 인도 중앙은행(RBI)은 정책 금리를 6.5%로 유지했으나 중앙은행이 향후 금리 인하를 단행하면 루피화 하락 압력이 더 거세질 전망이다.
다만 인도의 경우에는 막대한 외환보유고 규모 등을 감안할 때 중앙은행이 루피화 하락에 대처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씨티 웰스는 2025년 전망 보고서에서 "RBI의 막대한 외환보유고가 인도 루피화에 큰 안정성을 가져왔다"면서 "루피화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통화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이수정 기자 soojunglee@g-enews.com